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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시인 / 구두 밑에서 말발굽 소리가 난다
구두 밑에서 따그락 따그락 말발굽 소리가 난다 구두를 벗어 보니 구두 뒷굽에 구멍이 났다 닳을 대로 닳은 구두 뒷굽을 뚫고 들어간 돌멩이들이 부딪히며 걸을 때마다 챙피한 소리를 낸다 바꿔야지, 바꿔야지 작심하고 다닌 게 몇 달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체념하고 다닌 게 또 몇 달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광주로 마산으로, 다시 부산으로 떠돌아다니는 동안 빗물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구두 빙판길에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엄지발가락에 꾸욱 힘을 줘야 했던 구두 걸을 때마다 말발굽 소리를 낸다 빼고 나면 다시 들어가 박히고 빼고 나면 또 다시 들어가 박히는 소리 지친 걸음에 박자를 맞춰주는 소리 닳고 닳은 발굽으로 열 정거장 스무 정거장 빈주머니에 빈손을 감추고 걸어가는 동안 들려오지 않으면 이제는 왠지 허전해진다 그만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이럇 뒷굽을 치며 갈기를 휘갈기는 소리 따그락 따그락 무거운 몸에 리듬을 실어주는 소리
손택수 시인 / 구두 속의 물고기
출판사 신간 보도자료 들고 광화문 신문사들 돌아다니다 나무 아래 구두 벗어놓고 잠시 땀을 식히는데 어디서 날아온 것인가 구두 속으로 들어간 나뭇잎이 그 옛날 강가에서 놀다 고무신 속에 품어온 각시붕어 같다 족두리를 닮은 지느러미가 흔들릴 때마다 먼 훗날 만날 각시를 생각하며 흐뭇해하던 아이가 있었다.
각시야 각시야 쌀 장만하러 돌아다니다 늙어버린 구두를 용서하렴 결혼기념일도 잊고 생일도 잊고 너를 풀어놓을 우물마저 잊어버렸구나 우물에 대고 부르던 노래도 더는 들려줄 수 없구나
여울돌에 낀 이끼를 뜯어 먹더라도 나는 한때 그 강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등을 뚫는 아픔 없이 어찌 풍경이 될까 절집 처마 끝에 올라 풍경소리 들려줄 수 있을까 다독이며 다독이며 참으로 멀리도 흘러왔는데
나뭇잎은 땀에 전 바닥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내 몸 어디에 아직 떠나온 강물소리 출렁이고 있을까만 그 옛날 영산강 배꼽다리 대숲 마을 고무신 속 각시붕어처럼 젖은 구두 벌어진 어항 속을 유영하고 있다
손택수 시인 / 구름의 실감
수국을 보면 나는 좀 은밀해진다 누가 보나 안 보나, 다치지 않게, 꽃둘레를 가만히 안아보고 싶어진다
그때 내 손은 영락없는 브레지어 컵, 애인의 선물을 사러 갔다가 사이즈를 묻는 매장 직원에게 나도 몰래 두 손을 벌려 안아보던 허공의 컵
수국을 품고 있으면, 꽃뭉치 더 처지지 않게 받쳐 들고 있으면, 컵 너머로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구름이 있다 손가락을 넘치는 꽃 범벅
등 뒤로 돌아가며 브래지어 호크라도 채워주듯이 수국이 피면, 수국을 따라 그대로 굳어져도 좋을 것 같은 손으로
손택수 시인 / 길이 나를 들어올린다
구두 뒤축이 들렸다 닳을 대로 닳아서 뒤축과 땅 사이에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 한 공간이 생겼다 깨어질 대로 깨어진 구두코를 닦으며 걸어오는 동안, 길이 이 지긋지긋한 길이 나를 들어 올리고 있었나 보다 닳는 만큼, 발등이 부어오르는 만큼 뒤꿈치를 뽈끈 들어 올려주고 있었나 보다 가끔씩 한쪽으로 기우뚱 몸이 기운다는 건 내 뒤축이 허공을 딛고 있다는 얘기 허공을 디디며 걷고 있다는 얘기 이제 내가 딛는 것의 반은 땅이고 반은 허공이다 그 사이에 내 낡은 구두가 있다
손택수 시인 / 꽃 벼랑
벼랑을 쥐고 꽃이 피네 실은 벼랑이 품을 내어준 거라네
저 위에서 오늘도 누가 밥을 짓고 있나 칭얼대는 어린 것을 업고 옥상 위에 깃발처럼 빨래를 내다 말리고 있나
구겨진 옷 주름을 몇 번 더 구기면서, 착지 못한 나머지 발을 올려놓으려 틈을 노리는 출근버스 창밖
찡그리면서도 꽃은 피네 실은 찡그림마저도 피어나 꽃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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