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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택수 시인 / 꽃 단추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19.

손택수 시인 / 꽃 단추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 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손택수 시인 / 나무의 수사학

 

 

꽃이 피었다

도시가 나무에게

반어법을 가르친 것이다

이 도시의 이주민이 된 뒤부터

속마음을 곧이 곧대로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나도 곧 깨닫게 되었지만

살아있자, 악착같이 들뜬 뿌리라도 내리자

속마음을 감추는 대신

비트는 법을 익히게 된 서른 몇 이후부터

나무는 나의 스승

그가 견딜 수 없는 건

꽃향기 따라 나비와 벌이

붕붕거린다는 것

내성이 생긴 이파리를

벌레들이 변함없이 아삭아삭

뜯어먹는다는 것

도로가 시끄러운 가로등 곁에서 허구한날

신경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피어나는 꽃

참을 수 없다 나무는, 알고 보면

치욕으로 푸르다.

 

 


 

 

손택수 시인 / 다람쥐야 쳇바퀴를 돌려라

 

 

다람쥐의 건망증은 참으로 위대하다

다람쥐가 땅속에 묻어놓고 잊어버린

도토리들이 자라서 상수리나무가 되었다면

상수리나무가 이룬 숲과

숲이 불러들인 새 울음소리.

모두가 다 다람쥐의 건망증 덕분이 아닌가

한겨울 눈이라도 내리면

파묻어 논 양식을 도무지 찾지 못해

부르튼 두 손을 부비며 떨고 있었을 다람쥐

그 차디찬 시장기에 가슴 한 쪽이 찌르르 아파오긴 하지만

다람쥐의 건망증 때문에 세상은

그나마 간신히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양 볼이 뽈통하게 튀어나오도록 양식을 거두고

언젠가 고 작은 손이 부르트도록

땅속 깊이 심어놓은 한 톨 위에 올라가 무심히

뛰어 놀고 있는 다람쥐,

제가 본 세상을 온전히 기억하고 싶어

자신의 기억 한쪽을 애써 지워버렸나 보다

 

 


 

 

손택수 시인 / 단풍나무 빤스

 

 

아내의 빤스에 구멍이 난 걸 알게 된 건

단풍나무 때문이다

 

단풍나무가 아내의 꽃무늬 빤스를 입고

볼을 붉혔기 때문이다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을 넘어

아파트 화단 아래 떨어진

아내의 속옷,

 

나뭇가지에 척 걸쳐져

속옷 한 벌 사준 적 없는

속없는 지아비를

빤히 올려다보는 빤스

 

누가 볼까 얼른 한달음에 뛰어내려가

단풍나무를 기어올랐다 나는

 

첫날밤처럼

구멍 난 단풍나무 빤스를

벗기며 내내

볼이 화끈거렸다

 

그 이후부터다, 단풍나무만 보면

단풍보다 내 볼이 더 바알개지는 것은

 

 


 

 

손택수 시인 / 목련 전차

 

 

목련이 도착했다

한전 부산지사 전차 기지터 앞

꽃들이 조금 일찍 봄나들이를 나왔다

나도 꽃 따라 나들이나 나갈까

심하게 앓고 난 뒤의 머릿속처럼

맑게 갠 하늘 아래,

전차 구경 와서 아주 뿌리를 내렸다는

어머니 아버지도 그랬겠지

꽃 양산 활짝 펴 든

며느리 따라 구경 오신 할아버지도 그랬겠지

나뭇가지에 코일처럼 감기는 햇살,

저 햇살을 따라가면

나무 어딘가에 숨은 전동기가 보일른지 모른다

지난밤 내리치던 천둥번개도 찌릿찌릿

저 코일을 따라가서 동력을 얻지 않았는지,

한 량 두 량 목련이 떠나간다

꽃들이 전차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든다

저 꽃 전차를 따라가면, 어머니 아버지

신혼 첫 밤을 보내신 동래온천이 나온다.

 

 


 

손택수(孫宅洙, 1970년 ~ ) 시인

1970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났으며, 경남대학교 국문학과와 부산대학교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으로 등단했으며, 2002년 제2회 부산작가상을, 「목련 전차」, 「아버지의 등을 밀며」 등 5편의 시로 2003년 문학세계사가 주관하는 제9회 현대시 동인상을 수상했다. 첫 시집인 『호랑이 발자국』으로 2004년 제22회 신동엽창작상을 받았다. 2005년에는 제2회 육사시문학상 신인상, 제3회 애지문학상을 수상했다. 2007년 시집 『목련 전차』로 제14회 이수문학상을 수상했다. 2013년 제13회 노작문학상에 '저물녘의 왕오천축국전' 등 5편이 선정됐다. 현재 실천문학사 대표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