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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시인 / 꽃 단추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 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손택수 시인 / 나무의 수사학
꽃이 피었다 도시가 나무에게 반어법을 가르친 것이다 이 도시의 이주민이 된 뒤부터 속마음을 곧이 곧대로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나도 곧 깨닫게 되었지만 살아있자, 악착같이 들뜬 뿌리라도 내리자 속마음을 감추는 대신 비트는 법을 익히게 된 서른 몇 이후부터 나무는 나의 스승 그가 견딜 수 없는 건 꽃향기 따라 나비와 벌이 붕붕거린다는 것 내성이 생긴 이파리를 벌레들이 변함없이 아삭아삭 뜯어먹는다는 것 도로가 시끄러운 가로등 곁에서 허구한날 신경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피어나는 꽃 참을 수 없다 나무는, 알고 보면 치욕으로 푸르다.
손택수 시인 / 다람쥐야 쳇바퀴를 돌려라
다람쥐의 건망증은 참으로 위대하다 다람쥐가 땅속에 묻어놓고 잊어버린 도토리들이 자라서 상수리나무가 되었다면 상수리나무가 이룬 숲과 숲이 불러들인 새 울음소리. 모두가 다 다람쥐의 건망증 덕분이 아닌가 한겨울 눈이라도 내리면 파묻어 논 양식을 도무지 찾지 못해 부르튼 두 손을 부비며 떨고 있었을 다람쥐 그 차디찬 시장기에 가슴 한 쪽이 찌르르 아파오긴 하지만 다람쥐의 건망증 때문에 세상은 그나마 간신히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양 볼이 뽈통하게 튀어나오도록 양식을 거두고 언젠가 고 작은 손이 부르트도록 땅속 깊이 심어놓은 한 톨 위에 올라가 무심히 뛰어 놀고 있는 다람쥐, 제가 본 세상을 온전히 기억하고 싶어 자신의 기억 한쪽을 애써 지워버렸나 보다
손택수 시인 / 단풍나무 빤스
아내의 빤스에 구멍이 난 걸 알게 된 건 단풍나무 때문이다
단풍나무가 아내의 꽃무늬 빤스를 입고 볼을 붉혔기 때문이다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을 넘어 아파트 화단 아래 떨어진 아내의 속옷,
나뭇가지에 척 걸쳐져 속옷 한 벌 사준 적 없는 속없는 지아비를 빤히 올려다보는 빤스
누가 볼까 얼른 한달음에 뛰어내려가 단풍나무를 기어올랐다 나는
첫날밤처럼 구멍 난 단풍나무 빤스를 벗기며 내내 볼이 화끈거렸다
그 이후부터다, 단풍나무만 보면 단풍보다 내 볼이 더 바알개지는 것은
손택수 시인 / 목련 전차
목련이 도착했다 한전 부산지사 전차 기지터 앞 꽃들이 조금 일찍 봄나들이를 나왔다 나도 꽃 따라 나들이나 나갈까 심하게 앓고 난 뒤의 머릿속처럼 맑게 갠 하늘 아래, 전차 구경 와서 아주 뿌리를 내렸다는 어머니 아버지도 그랬겠지 꽃 양산 활짝 펴 든 며느리 따라 구경 오신 할아버지도 그랬겠지 나뭇가지에 코일처럼 감기는 햇살, 저 햇살을 따라가면 나무 어딘가에 숨은 전동기가 보일른지 모른다 지난밤 내리치던 천둥번개도 찌릿찌릿 저 코일을 따라가서 동력을 얻지 않았는지, 한 량 두 량 목련이 떠나간다 꽃들이 전차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든다 저 꽃 전차를 따라가면, 어머니 아버지 신혼 첫 밤을 보내신 동래온천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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