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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택수 시인 / 물새 발자국 따라가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0.

손택수 시인 / 물새 발자국 따라가다

 

 

모래밭 위에 무수한 화살표들,

앞으로 걸어간 것 같은데

끝없이 뒤쪽을 향하여 있다

 

저물어 가는 해와 함께 앞으로

앞으로 드센 바람 속을

뒷걸음질치며 나아가는 힘, 저 힘으로

 

새들은 날개를 펴는가

제 몸의 시윗줄을 끌어당겨

가뜬히 지상으로 떠오르는가

 

따라가던 물새 발자국

끊어진 곳 쯤에서 우둑하니 파도에 잠긴다

 

 


 

 

손택수 시인 / 물수제비 잘 뜨는 법

 

 

1

 

물결의 미끄러움에 볼을 부볐다 뗄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미끈한 돌을 찾아 한나절쯤을 순전히

길바닥만 보고 돌아다녀본 적이 있는가

무엇보다 손바닥에 폭 감싸인 돌을 만지작만지작

체온과 맥박소리를 돌에게 고스란히 전달해본 적이 있는가

돌을 쥘 땐 꽃잎을 감싸쥐듯, 돌을 날릴 땐

나뭇가지가 꽃잎을 놓아주듯

미련을 두지 않아야 한다

바람 한점 없는데 나뭇가지가 툭, 자신을 흔들 때의 느낌으로

손목 스냅을 사용할 줄 안다는 그것, 그건

이별의 끝에서 돌과 함께 날아갈 채비가 되어 있다는 거다

 

스침에도 몰입이 있어, 딱

성냥을 긋듯이

단번에 한점을 향해 화락

타들어가는 정신,

 

2

 

그러나 처음 물에 닿은 돌을 튕겨올린 건 내가 아니라 수면이다

나의 일은 수면을 깨우는 것으로 족하다 그다음 돌을 튕겨올리는

건 물결들이 알아서 할 일, 앞물결의 설렘이 뒷물결까지 이어지도

록 그냥 내버려둘 일

 

똑똑똑, 가능한 한 긴 노크 속에

나른하게 퍼져 있던 수면을 바짝 잡아당기면서

 

 


 

 

손택수 시인 / 버려진 집 속에 거울이 있다

 

 

집을 버리면서, 거울을

두고 오는 건 차마 못할 짓이다

 

버려진 제 모습을 쳐다볼 수 없어

먼지를 풀썩이며 조용히 미쳐가는

집의 거울을 보라

 

집은 제 얼굴에 화장을 하는 대신

거울에 화장을 한다

거울에 파우더 분가루 같은

먼지를 덕지덕지 처발라

망가져 가는 제 얼굴을 흐릿하게 뭉개어본다

 

그렇게 남은 날을 견뎌야 한다는 건,

아무래도 지나친 형벌이다

 

폐가는 금이 가거나, 깨어진

거울조각을 품고 있다

 

 


 

 

손택수 시인 / 범일동 블루스

 

 

1

 

  방문을 담벼락으로 삼고 산다. 애 패는 소리나 코고는 소리, 지지고 볶는 싸움질 소리가 기묘한 실내악을 이루며 새어나오기도 한다. 헝겊 하나로 간신히 중요한 데만 대충 가리고 있는 사람 같다. 샷시문과 샷시문을 잇대어 난 골목길. 하청의 하청을 받은 가내수공업과 들여놓지 못한 세간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간밤의 이불들이 걸어나와 이를 잡듯 눅눅한 습기를 톡, 톡, 터뜨리고 있다. 지난밤의 한숨과 근심까지를 끄집어내 까실까실하게 말려주고 있다.

 

2

 

  간혹 구질구질한 방안을 정원으로 알고 꽃이 피면 골목길에 퍼뜩 내다놓을 줄도 안다. 삶이 막다른 골목길 아닌 적이 어디 있었던가, 자랑삼아 화분을 내다놓고 이웃사촌한 햇살과 바람을 불러오기도 한다. 입심 좋은 그 햇살과 바람, 집집마다 소문을 퍼뜨리며 돌아다니느라 시끌벅적한 꽃향, 꽃향이 내는 골목길.

 

3

 

  코가 깨지고 뒤축이 닳을 대로 닳아서 돌아오는 신발들, 비좁은 집에 들지 못하고 밖에서 노독을 푼다. 그 신발만 세어봐도 어느 집에 누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어느 집에 자고 가는 손님이 들었고, 그 집 아들은 또 어디에서 쑥스런 잠을 청하고 있는지 빤히 알아맞힐 수 있다. 비라도 내리면 자다가도 신발을 들이느라 샷시문 여는 소리가 줄줄이 이어진다. 자다 깬 집들은 낮은 처마 아래 빗발을 치고 숨소리를 낮춘 채 부시럭부시럭거린다. 그 은근한 소리, 빗소리가 눈치껏 가려주고 간다.

 

4

 

  마당 한 평 현관 하나 없이 맨몸으로 만든 집들. 그 집들 부끄러울까봐 유난히 좁다란 골목길. 방문을 담벼락으로 삼았으니, 여기서 벽은 누구나 쉽게 열고 닫을 수가 있다 할까. 나는 감히 말할 수가 없다. 다만 한바탕 울고 난 뒤엔 다시 힘이 솟듯, 상다리 성치 않은 밥상 위엔 뜨건 된장국이 오를 것이고, 새새끼들처럼 종알대는 아이들의 노래소리 또한 끊임없이 장단을 맞춰 흘러나올 것이다. 젖꼭지처럼 붉게 튀어나온 너의 집 초인종 벨을 누르러 가는 나의 시간도 변함없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질 것이다.

 

 


 

 

손택수 시인 / 벚나무 실업률

 

 

해마다 봄이면 벚나무들이

이 땅의 실업률을 잠시

낮추어줍니다

 

꽃에도 생계형으로 피는

꽃이 있어서

배곯는 소리를 잊지 못해 피어나는

꽃들이 있어서

 

겨우내 직업소개소를 찾아다닌 사람들이

벚나무 아래 노점을 차렸습니다

솜사탕 번데기 뻥튀기

벼라별 것들을 트럭에 다 옮겨싣고

여의도 광장까지 하얗게 치밀어오르는 꽃들

 

보다 보다 못해 벚나무들이 나선 것입니다

벚나무들이 전국 체인망을 가동시킨 것입니다

 

 


 

손택수(孫宅洙, 1970년 ~ ) 시인

1970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났으며, 경남대학교 국문학과와 부산대학교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으로 등단했으며, 2002년 제2회 부산작가상을, 「목련 전차」, 「아버지의 등을 밀며」 등 5편의 시로 2003년 문학세계사가 주관하는 제9회 현대시 동인상을 수상했다. 첫 시집인 『호랑이 발자국』으로 2004년 제22회 신동엽창작상을 받았다. 2005년에는 제2회 육사시문학상 신인상, 제3회 애지문학상을 수상했다. 2007년 시집 『목련 전차』로 제14회 이수문학상을 수상했다. 2013년 제13회 노작문학상에 '저물녘의 왕오천축국전' 등 5편이 선정됐다. 현재 실천문학사 대표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