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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은교 시인 / 가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0.

강은교 시인 / 가을

 

 

기쁨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 바람 불던 날 살짝 가 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강은교 시인 / 나무가 말하였네

 

 

나무가 말하였네

 

나의 이 껍질은 빗방울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햇빛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구름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안개의 휘젓는 팔에

어쩌다 닿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당신이 기대게 하기 위해서

당신 옆 하늘의

푸르고 늘씬한 허리를 위해서

 

 


 

 

강은교 시인 / 내 만일

 

 

내 만일 폭풍이라면

저 길고 튼튼한 너머로

한번 보란 듯 불어볼 텐데...

그래서 그대 가슴에 닿아볼 텐데...

 

번쩍이는 벽돌쯤 슬쩍 넘어뜨리고

벽돌 위에 꽂혀 있는 쇠막대기쯤

눈 깜짝할 새 밀쳐내고

그래서 그대 가슴 깊숙이

내 숨결 불어넣을 텐데...

 

내 만일 안개라면

저 길고 튼튼한 벽 너머로

슬금슬금 슬금슬금

기어들어

대들보건 휘장이건

한번 맘껏 녹여볼 텐데...

 

그래서 그대 피에 내 피

맞대어볼 텐데...

 

내 만일 종소리라면

어디든 스며드는

봄날 햇빛이라면

저 벽 너머

때없이 빛소식 봄소식 건네주고

우리 하느님네 말씀도 전해줄 텐데...

그래서 그대 웃음 기어코 만나볼 텐데...

 

 


 

 

강은교 시인 / 너를 사랑한다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 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일몰의 새 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강은교 시인 / 동백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우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강은교 시인

1945년 함남 홍원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 등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허무집』, 『풀잎』, 『빈자일기』, 『소리집』, 『붉은 강』, 『바람 노래』,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등 다수 있음. 그밖의 저서로는 산문집 『허무수첩』, 『추억제』, 『그물사이로』 등과 동화로 『숲의 시인 하늘이』, 『하늘이와 거위』 등이 있음.  1975년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과 1992년에는 제37회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