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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시인 / 가을
기쁨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 바람 불던 날 살짝 가 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강은교 시인 / 나무가 말하였네
나무가 말하였네
나의 이 껍질은 빗방울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햇빛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구름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안개의 휘젓는 팔에 어쩌다 닿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당신이 기대게 하기 위해서 당신 옆 하늘의 푸르고 늘씬한 허리를 위해서
강은교 시인 / 내 만일
내 만일 폭풍이라면 저 길고 튼튼한 너머로 한번 보란 듯 불어볼 텐데... 그래서 그대 가슴에 닿아볼 텐데...
번쩍이는 벽돌쯤 슬쩍 넘어뜨리고 벽돌 위에 꽂혀 있는 쇠막대기쯤 눈 깜짝할 새 밀쳐내고 그래서 그대 가슴 깊숙이 내 숨결 불어넣을 텐데...
내 만일 안개라면 저 길고 튼튼한 벽 너머로 슬금슬금 슬금슬금 기어들어 대들보건 휘장이건 한번 맘껏 녹여볼 텐데...
그래서 그대 피에 내 피 맞대어볼 텐데...
내 만일 종소리라면 어디든 스며드는 봄날 햇빛이라면 저 벽 너머 때없이 빛소식 봄소식 건네주고 우리 하느님네 말씀도 전해줄 텐데... 그래서 그대 웃음 기어코 만나볼 텐데...
강은교 시인 / 너를 사랑한다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 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일몰의 새 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강은교 시인 / 동백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우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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