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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정희 시인 / 가을 편지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0.

고정희 시인 / 가을 편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홀할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한 열린 문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습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

 

 


 

 

고정희 시인 / 가을을 보내며

 

 

사랑하는 이여

우리가 한 잔에서 목 축이지 못하는 오늘은

우리들 겸허한 허리를 구부려

서로의 잔에 그리움을 붓자

서로의 잔이 넘치게 하자

 

 


 

 

고정희 시인 / 강가에서

 

 

할 말이 차츰 없어지고

다시는 편지도 쓸 수 없는 날이 왔습니다

유유히 내 생을 가로질러 흐르는

유년의 푸른 풀밭 강둑에 나와

물이 흐르는 쪽으로

오매불망 그대에게 주고 싶은 마음

한쪽 둑 떼어

가거라 가거라 실어 보내니

그 위에 홀연히 햇빛 부서지는 모습

그 위에 남서풍이 입맞춤하는 모습

바라보는 일로도 해 저물었습니다

 

불현듯 강 건너 빈집에 불이 켜지고

사립에 그대 영혼 같은 노을이 걸리니

바위틈에 매여놓은 목란배 한 척

황혼을 따라

그대 사는 쪽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고정희 시인 / 강물에 빠진 달을 보러 가듯

 

 

강물에 빠진 달을 보러 가듯

새벽에 당신 사는 집으로 갑니다.

깨끗한 바람에 옷깃을 부풀리며

고개를 수그러뜨리고 말없이 걷는 동안

나는 생각합니다.

어제 부친 편지는 잘 도착되었을까

첫 줄에서 끝 줄까지 불편함은 없었을까

아직도 문은 열어두지 않았을까

아예 열쇠 수리공을 부를까

아니야, 그건 일종의 폭력이야

새벽에 어울리는 단정한 말들만이

내가 그에게 매달리는 희망인가?

신은 그 희망으로 목걸이를 약속하셨지

눈물로 혼을 씻는 자에게만 주시는 목걸이

아침이슬이 몸에 오싹하도록 걷고 또 걸어

나는 당신 집 앞에 발걸음을 멈춥니다.

골목은 고요하고 문은 굳게 닫겨 있습니다.

삼백여든아홉 번째 부자를 누르지만

아무 인기척도 들리지 않습니다.

품속에 간직한 초설 같은 편지 한장

문틈에 꽂아놓고 하늘을 봅니다.

 

 


 

 

고정희 시인 / 겨울 사랑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 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고정희【高靜熙, 1948 ~ 1991. 6. 9】 시인

본명은 성애. 1948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한국신학대학 졸업. 1975년 《현대시학》 추천으로 등단. 교수 잡지사 기자 등을 거쳐 『또 하나의 문화』 창간 동인,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역임. 1991년 6월 지리산에서 실족사로 요절.  '목요시' 동인으로 오월 시인으로 활동.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광주의 눈물비』(1990), 『여성 해방 출사표』(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 등의 시집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