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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택수 시인 / 봄은 자꾸 와도 새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1.

손택수 시인 / 봄은 자꾸 와도 새봄

 

 

사랑은 지루하지 않죠. 지루한 건 사랑이 아니예요

아무리 지루한 풍경이라도 사랑 속에 있을 땐

가슴이 두근거리거든요

 

사랑은 그러니까

습관이 되어도 좋아요. 중독이 되어도 괜찮죠

파도는 지치지 않잖아요

 

봄은 자꾸 와도 자꾸 반복되어도

여전히 새봄이잖아요

꽃은 자꾸 펴도, 자꾸 졌다 피길 버릇해도

물릴 일이 없잖아요

 

절망이 습관이면 곤란하죠. 반성도 버릇이면 곤란하죠

사람이 절망과 반성의 기계가 된다면

그처럼 속상한 일이 어딨겠어요

 

사랑 속엔 결고 버릇이 될 수 없는 절망과 반성이 있거든요

그러니 사랑에만 중독이 되기로 해요 우리

자꾸 와도 새봄인 봄처럼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기로 해요

 

 


 

 

손택수 시인 / 빛의 감옥

 

 

가로등 어디에 틈이 있어

날벌레들이 그 속을 파고드는 모양이다

입구를 잃어버린 날벌레 한 마리가

램프를 감싼 유리등을 두드리고 있다

유리벽에 머리를 짓찧고 있다

저 환한 무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얼마나 파닥거리며 왔던가

무덤의 중심으로부터 밀려나지 않기 위하여

발버둥을 쳤던가

비명으로 꽉 찬 유리 속에 간신히

둥지를 튼다

쿵, 이삿짐을 풀고 내다보는 거리

가로등이 거리를 밝히는 대신 감추고 있는,

유리알 속에 아침마다 눈곱이 낀다.

 

 


 

 

손택수 시인 / 사과의 신방(新房)

 

 

사과가 너무 빨리 익으면

달고 진한 맛이 잘 나지 않는 법이다

조급하게 따가운 볕 그대로 받았다간

겉과 속이 따로 놀기 십상

그러니 사내나 볕이나 적당히

퉁겨낼 줄 알아야 한다

사과 껍질 위에 껍질을 한 꺼풀 더 얹었으니

벗겨야 될 옷을 한 겹 더 껴입은 거 아니냐

이러면 볕이야 마구 감질이 나겠지만

창호문이 걸러낸 볕처럼

직수굿해진 볕이라야만

사과 볼빛 만큼 달콤한 맛을

쟁일 수 있는 것이다

 

챙 모자 쓴 아낙들이

종이 봉투로 한참 사과알을 싸고 있다

신방에 창호문 새로 바르고

머지 않아 분단장할 딸년들

연애 훈수라도 하듯이.

 

 


 

 

손택수 시인 / 살가죽 구두

 

 

세상은 그에게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맨발로 세상을 떠돌아다닌 그에게

검은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부산역 광장 앞

낮술에 취해

술병처럼 쓰러져

잠이 든 사내

 

맨발이 캉가루 구두약을 칠한 듯 반들거리고 있네

세상의 온갖 흙먼지와 기름때를 입혀 광을 내고 있네

 

벗겨지지 않는 구두,

그 누구도

벗겨 갈 수 없는

맞춤 구두 한 켤레

 

죽음만이 벗겨줄 수 있네

죽음까지 껴 신고 가야 한다네

 

 


 

 

손택수 시인 / 소가죽북

 

 

소는 죽어서도 매를 맞는다

살아서 맞던 채찍 대신 북채를 맞는다

살가죽만 남아 북이 된 소의

울음소리, 맞으면 맞을수록 신명을 더한다

 

노름꾼 아버지의 발길질 아래

피할 생각도 없이 주저앉아 울던

어머니가 그랬다

병든 사내를 버리지 못하고

버드나무처럼 쥐어뜯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울던 울음에도

저런 청승맞은 가락이 실려있었다

 

채식주의자의 질기디질긴 습성대로

죽어서도 여물여물

살가죽에 와닿는 아픔을 되새기며

둥 둥 둥 둥 지친 북채를 끌어당긴다

끌어 당겨 연신 제 몸을 친다

 

 


 

손택수(孫宅洙, 1970년 ~ ) 시인

1970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났으며, 경남대학교 국문학과와 부산대학교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으로 등단했으며, 2002년 제2회 부산작가상을, 「목련 전차」, 「아버지의 등을 밀며」 등 5편의 시로 2003년 문학세계사가 주관하는 제9회 현대시 동인상을 수상했다. 첫 시집인 『호랑이 발자국』으로 2004년 제22회 신동엽창작상을 받았다. 2005년에는 제2회 육사시문학상 신인상, 제3회 애지문학상을 수상했다. 2007년 시집 『목련 전차』로 제14회 이수문학상을 수상했다. 2013년 제13회 노작문학상에 '저물녘의 왕오천축국전' 등 5편이 선정됐다. 현재 실천문학사 대표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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