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강은교 시인 / 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1.

강은교 시인 / 별

 

 

새벽 하늘에 혼자 빛나는 별

홀로 뭍을 물고 있는 별

너의 가지들을 잘라 버려라

너의 잎을 잘라 버려라

 

저 섬의 등불들,

오늘도 검은 구름의 허리에

꼬옥 매달려 있구나

 

별 하나 지상에 내려서서

자기의 뿌리를 걷지 않는다

 

 


 

 

강은교 시인 / 사랑법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있는 누워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뒤에 있다.

 

 


 

 

강은교 시인 / 서시

 

 

이제 눈뜨게 하십시오

눈떠 저희의 손과 발

바람 속에 흔들게 하십시오.

 

수천킬로미터의

들판을 지나

들판에 겹겹이 앉아 있는 노을들과

굽이치는 죽음을 지나

 

당신이시여

검붉은 피 여직 흐르는

슬픈 가슴이시여

 

여기엔 머뭇거리는 길뿐이오니

여기엔

눈먼 안개와

허우적이는 그림자들뿐이오니

 

아,이제 일어서게 하십시오.

일어서 당신의 깊은 가슴 속

저희가 헤엄치게 하십시오

저희의 피가 수평선을 이루고

저희의 흐느낌이

함께함께

출렁이게 하십시오

 

 


 

 

강은교 시인 / 수평선

 

 

이제는 돌아갑시다

돌아가 깊이깊이

어둠에 얼굴을 담급시다

수만 주름살 가만가만

몸 흔드는 바닷가

철없이 나와 앉은 피안의 등불들

거품으로 거두고

큰 소리 한 번 외쳐 봅시다

 

부서지는 것은

파도만은 아니리

부서지면서 온전한 것

 

또한 바다만은

아니리

 

 


 

 

강은교 시인 /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에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를 말하면서

올 대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강은교 시인

1945년 함남 홍원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 등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허무집』, 『풀잎』, 『빈자일기』, 『소리집』, 『붉은 강』, 『바람 노래』,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등 다수 있음. 그밖의 저서로는 산문집 『허무수첩』, 『추억제』, 『그물사이로』 등과 동화로 『숲의 시인 하늘이』, 『하늘이와 거위』 등이 있음.  1975년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과 1992년에는 제37회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