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정희 시인 / 그대 생각
너인가 하면 지나는 바람이어라 너인가 하면 열사흘 달빛이어라 너인가 하면 흐르는 강물소리여라 너인가 하면 흩어지는 구름이어라 너인가 하면 적막강산 안개비여라 너인가 하면 끝모를 울음이어라 너인가 하면 내가 내 살 찢는 아픔이어라
고정희 시인 / 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사발을 들어올릴 때
하루 일 끝마치고 황혼 속에 마주앉은 일일 노동자 그대 앞에 막 나온 국수 한 사발 그 김 모락모락 말아 올릴 때
남도 해 지는 마을 저녁연기 하늘에 드높이 올리듯 두 손으로 국수사발 들어올릴 때
무량하여라 청빈한 밥그릇의 고요함이여 단순한 순명의 너그러움이여 탁배기 한잔에 어스름이 살을 풀고 목메인 달빛이 문 앞에 드넓다
고정희 시인 / 꿈꾸는 가을노래
들녘에 고개숙인 그대 생각 따다가 반가운 손님 밥을 짓고 코스모스 꽃길에 핀 그대 사랑 따다가 정다운 사람 술잔에 띄우니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늠연히 다가오는 가을하늘 밑 시월의 선연한 햇빛으로 광내며 깊어진 우리 사랑 쟁쟁쟁 흘러가네 그윽한 산그림자 어질머리 뒤로 하고 무르익은 우리 사랑 아득히 흘러가네 그 위에 황하가 서로 흘러 들어와 서쪽 곤륜산맥 물보라 동쪽 금강산맥 천봉을 우러르네.
고정희 시인 / 날개
생일선물을 사러 인사동에 갔습니다 안개비 자욱한 그 거리에서 삼천도의 뜨거운 불 기운에 구워내고 삼천도의 냉정한 이성에 다듬어 낸 분청들국 화병을 골랐습니다 일월성신 술잔 같은 이 화병에 내 목숨의 꽃을 꽂을까, 아니면 개마고원 바람 소릴 매달아 놓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장백산 천지연 물소리 풀어 만주 대륙 하늘까지 어리게 할까 가까이서 만져 보고 덜어져서 바라보고 위아래로 눈인두 질하는 내게 주인이 다가와 말을 건넸지요 손님은 돈으로 선물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선물을 고르고 있군요 이 장사 삼십 년에 마음의 선물을 포장하기란 그냥 줘도 아깝지 않답니다 도대체 그분은 얼마나 행복하죠? 뭘요 마음으로 치장한들 흡족하지 않답니다 이 분청 화병에는 날개가 달려 있어야 하는데 그가 이 선물을 타고 날아야 하는데 이 선물이 그의 가슴에 돌이 되어 박히면 난 어쩌죠?
고정희 시인 /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고요하여라 너를 내가슴에 품고 있으면 무심히 지나는 출근 버스 속에서도 추운이들 곁에 따뜻한 차 한잔 끓이는 것이 보이고
울렁거려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여수 앞바다 오동도쯤에서 춘설속에 적동백 화드득 화드득 툭 터지는 소리 들리고
눈물겨워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중국 산동성에서 날아온 제비들 쓸쓸한 처마, 폐허의 처마밑에 자유의 둥지 사랑의 둥지 부드러운 혁명의 둥지 하나둘 트인 것 이 보이고.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우성 시인 / 저기 오래된 별에 (0) | 2020.07.21 |
|---|---|
| 정영효 시인 / 북소리의 뒤쪽 2 (0) | 2020.07.21 |
| 강은교 시인 / 별 외 4편 (0) | 2020.07.21 |
| 곽승란 시인 / 구월의 가을 외 6편 (0) | 2020.07.21 |
| 손택수 시인 / 봄은 자꾸 와도 새봄 외 4편 (0) | 2020.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