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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시인 / 지축을 지나다
지축은 십 년 넘게 폐허였다 나는 폐허를 지나야만 서울로 들어갈 수 있었다
북한산 아랫마을 삼호선 지하철 창문으로 사라진 골목과 목욕탕과 전봇대가 아침저녁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세면을 할 때마다 섬찟, 더듬어보는 뼈 같았다 세면을 할 때마다 잊는 해골 같았다
폐병쟁이 퀭한 얼굴 같은 살풍경이나마 재건축이 시작되면서 마을의 기억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폐허가 너와 나를 잇는 경계였던 시절도 가고 빗돌처럼 아파트가 올라온다 그만 외면하고 싶은 얼굴 외면하지 못하도록 출퇴근 때마다 마주 보던 지축
폐허를 잃어버린 폐허의 얼굴이 창유리 속에 박혀 있다
손택수 시인 / 차심
차심이라는 말이 있지 찻잔을 닦지 않아 물이끼가 끼었나 했더니 차심으로 찻잔을 길들이는 거라 했지 가마 속에서 흙과 유약이 다툴 때 그릇에 잔금이 생겨요 뜨거운 찻물이 금 속을 파고들어가 그릇색이 점점 바뀌는 겁니다 차심 박힌 그릇의 금은 병균도 막아주고 그릇을 더 단단하게 조여준다고…… 불가마 속의 고통을 다스리는 차심, 그게 차의 마음이라는 말처럼 들렸지 수백 년 동안 대를 이은 잔에선 차심만 우려도 차맛이 난다는데 갈라진 너와 나 사이에도 그런 빛깔을 우릴 수 있다면 아픈 금 속으로 찻물을 내리면서 금마저 몸의 일부인 양
손택수 시인 / 탱자나무 울타리 속의 설법
가시 끝에 탱글탱글 빗방울이 열렸다 나무는 빗방울 속에 들어가 물장구치며 노는 햇살과 구름, 터질 것처럼 부풀어오른 새 울음 소리까지를 고동 속처럼 알뜰히 빼어 먹는다
가시 끝에 맺힌 빗방울들, 가슴 깊이 가시를 물고 떨고 있다
살 속을 파고든 비수를 품고 둥그래진다는 것, 그건 욱신거린는 상처를 머금고 사는 일이다 입술을 윽 깨물고 상처 속으로 들어가 한 몸이 되는 일이다
열매들은 모두 빗방울을 닮아 둥그래질 것이다 빗방울의 아픔을 궁글려 탱탱한 탱자 알이 될 것이다
바람이 불자, 내 어둔 이마 위로 빗방울 하나가 고동껍질처럼 떼구루루 떨어져 내렸다
손택수 시인 / 포옹
강아지가 몸을 말아 저를 껴안는다 온기가 달아나지 않게. 양쪽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고 나도 나를 안아본다
겨울은 혼자서 포옹하기 좋은 계절이다
손택수 시인 / 홍어
어느날인가는 시큼한 홍어가 들어왔다 마을에 잔치가 있던 날이었다 김희수씨네 마당 한가운데선 김나는 돼지가 설겅설겅 썰어지고 국솥이 자꾸 들썩거렸다 파란 도장이 찍히지 않은 걸로다가 나는 고기가 한 점 먹고 싶고 김치 한 점 척 걸쳐서 오물거려보고 싶은데 웬일로 어머니 눈엔 시큼한 홍어만 보이는 것이었다 홍어를 먹으면 아이의 살갗이 홍어처럼 붉어지느니라 지엄하신 할머니 몰래 삼킨 홍어 불그죽죽한 등을 타고나는 무자맥질이라도 쳤던지 영산강 끝 바닷물이 밀려와서'흑산도 등대까지 실어다줄 것만 같았다 죄스런 마음에 몇 번이고 망설이다, 어머니 채 소화도 시키지 못한 것을 토해내고 말았다는데 나는 문득문득 그 홍어란 놈이 생각나는 것이다 세상에 나서 처음 먹는 음식인데 언젠가 맛본 기억이 나고 무슨 곡절인지 울컥 서러움이 치솟으면 어머니 뱃속에 있던 열 달이 생각나곤 하는 것이다.
손택수 시인 / 화살나무
언뜻 내민 촉들은 바깥을 향해 기세 좋게 뻗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제 살을 관통하여, 자신을 명중시키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모여들고 있는 가지들
자신의 몸 속에 과녁을 갖고 산다 살아갈수록 중심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동심원, 나이테를 품고 산다 가장 먼 목표물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으니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는, 시윗 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산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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