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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은교 시인 / 붉은 해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4.

강은교 시인 / 붉은 해

 

 

여기서 해는 서산으로 지는데

붉은 해 등진 큰 벌에서

바리바리 피를 모으던 어머니

좋은 날 좋은 시를 가렸지만

부끄러워라 우리 살은

한 대접 냉수에도 쉬이 풀리는

소금이라 하더이다.

 

 


 

 

강은교 시인 / 비

 

 

부르는 것들이 많아라

부르며 몸부림치는 것들이 많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이 오는 날

눈물 하나 떨어지니

후둑후둑 빗방울로 열 눈물 떨어져라

길 가득히 흐르는 사람들

갈대들처럼 서로서로 부르며

젖은 저희 입술 한 어둠에 부비는 것 보았느냐

아아 황홀하여라

길마다 출렁이는 잡풀들 푸른 뿌리.

 

 


 

 

강은교 시인 / 연애

 

 

그대가 밖으로 나가네

등불 하나를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그대를 따라 깊어진 어둠도 밖으로 나가네

문에는 든든한 네 개의 열쇠를 채우고

늙어오는 길과

늙어 있는 길을 지나

 

그대가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네

등불 둘을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이 다정한 뭍의 死者들

자정엔 헛소리를 꺼내 드는

아, 이 바닥없는 뭇 잠의 추억들

 

그대가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네

등불 셋을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그대가 돌아오지 않네

 

 


 

 

강은교 시인 / 아주 오래된 이야기

 

 

무엇인가 창문을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강은교 시인

1945년 함남 홍원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 등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허무집』, 『풀잎』, 『빈자일기』, 『소리집』, 『붉은 강』, 『바람 노래』,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등 다수 있음. 그밖의 저서로는 산문집 『허무수첩』, 『추억제』, 『그물사이로』 등과 동화로 『숲의 시인 하늘이』, 『하늘이와 거위』 등이 있음.  1975년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과 1992년에는 제37회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