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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 없다
있다, 무대가 있다. 검은 장막이 있다.
한쪽에는 엎드린 사람이, 다른 한쪽에는 별을 쏟은 자국이,
바람에 술래가 된 여자가 있었다. 긴 방죽을 따라 루마니아로 가고 싶던 아이와, 실오라기 하나 없는 맨몸과, 발자국 대신 별자국을 찍으며 가는 아이가 있었다. 말라서 바스러진 아이가 있었다. 월경 대신 월식을 하는 아이가 있었다.
허공 속에는 초점 없는 검은 눈동자, 양철통 속에는 버려진 이름, 방바닥에는 길게 그린 핏자국, 핏자국 위에는 다시 허공,
첫눈이 오고 방죽 위에 희게 엎드린 소녀가 있었다는데……, 루마니아, 루마니아, 활석가루를 눈처럼 뿌리던 소녀는 한 소년을 사랑했다는데……, 루마니아, 루마니아, 피에 젖은 루마니아, 신에게 용서받지 못한 작은 입술을 꽃술에 댔다는데……,
있다, 지붕 없는 집이, 파랗게 질린 손목이, 숨죽인 검은 여행가방이, 물거품처럼 희어지고 있는 목덜미가,
반나절을 타고도 다 타지 못한 벙어리장갑을 꼭 껴안고 달리는 소녀가 있었다. 나비를 가리키던 손가락이 얼어붙은 길 위에 일그러진 얼굴을 그리며 가고 있었다. 깨진 술병 위로 쓰러진 피투성이 계집애가 있었다.
목가구에 묻은 나비의 기억을 지우던 아이가, 고요 안으로 들어가 천천히 고요가 된 여자가, 점점 투명해지다 암전이 된 사람이 엎드려 있다.
계간 『미네르바』 2020년 봄호 발표
최형심 시인 / 밤의 둥근 껍질
너의 무덤에는 백양목 가지도 없어 우우우, 개들이 긴 목을 뺀다.
바람이 무심히 녹슨 그네를 흔들고 갔다는데, 곁에 누운 헝겊인형의 눈알이 가슴까지 내려와 흔들렸다는데
오래된 볕이 등을 말고 있는 동안 어린 목숨을 풀어 놓은 공중은 가벼워
둥근 껍질 속에서 어두워진 사람은 발목에 감긴 고요를 풀지 못한다. 화물열차가 너를 놓친 계절을 싣고 지나간다. 차가운 무릎을 당겨 마침내 어두워졌으므로 이제 너의 눈빛은 투명하고
젖어서 흐물거리던 꿈은 땅 밑을 흐른다.
정수리의 흰 뼈들 바스락거린다. 귀가 썩고 귀밑머리가 가지런해지는 동안 흰 발자국을 찍으며 또 겨울
밤의 둥근 목젖 속으로 바람 불어 잔뼈들 뒤척인다. 푸르던 이마 위, 연 날리던 소년은 산그늘을 끌어당겨 덮는다.
공중의 마른 가지들이 실핏줄처럼 뻗는 저녁,
가죽을 벗고 누운 눈 어두운 사람, 검은 눈과 검은 목소리와 검은 동네의 어둠이 선명하다.
풀뿌리 아래 정적이 낮게 내린다. 반달 눈썹을 떼어 머리맡에 둔다.
계간 『시와 사상』 2020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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