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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중일 시인 / 너의 너머의 너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4.

김중일 시인 / 너의 너머의 너울

 

 

1.

 

얼마 전 산과 바다로 사람들을 보낸 적 있는

너는 내 뒤에 산꼭대기를 보고

나는 네 뒤에 너울성 파도를 보고 있다

 

2.

 

내가 몸을 이리저리 돌리고 웅크리는 대로

강풍은 내 턱밑으로 비집고 들어올 틈을 만들었다

한동안 나는 담뱃불을 붙이는데 애먹고 있었다

내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라이터를 켜는 순간

너는 피자마자 사그라지는 라이터 불을 두 손가락으로 순식간에 집어서 쑥 뺐다

빨간 보자기 같은 불이 라이터에서 생각보다 오래

길게 뽑혀 나왔다

마술처럼 뽑아도 뽑아도 한동안 계속 나왔다

내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자

너는 길섶에 버릴 수도 없는 불꽃을 꿀꺽 삼켰다

너의 눈두덩이가 금세 붉어졌다 오늘도

나는 너의 너머의 일을 모르고 혼자 두고 어디로 갈 수도 없다

너는 점점 바위처럼 까매지고 있는 바다를 등지고 앉아 있다

나는 해일처럼 바다로 밀려가는 산을 등지고 앉아 있다

각자 등지고 있는 것을 아직 돌아보지 못한다

 

3.

 

바다보다 높이 치솟아 엄청난 해일처럼 바다를 삼킬 예정인 육지와 모든 산들이 바다를 막 덮치기 직전의 찰나인 오십억 년 동안 우리는 그 산과 바다 사이에 새떼처럼 우연히 모이고 필연이 흩어졌다가 어느 사이에 흙먼지나 물보라처럼 다시 가득 차서 이렇게 같이 오늘도 해 뜬 후 점점 어두워져만 가는 낯빛으로 있다

 

4.

 

바다를 등지고 앉은 너의 어깨는 마른 빨래처럼

수평선에 나란히 걸쳐 있다가

가끔 울컥

너의 어깨는

방파제 넘어 범람한 너울성 파도처럼

수평선보다 높이 튀어 오르고 넘쳐

내 옷을 적신다

흔들리는 너의 어깨가 테이블 위로 치솟았다가

바닥에 엎질러진 물처럼 철썩 쏟아진다

나는 엎질러진 물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모른다

 

5.

 

오십억 년 전부터 바다로 밀려오는 중인 산에 휩쓸려

그 일부가 되기까지

나는 오늘도 산을 등지고 있다

밀려오는 너울성 산에는 물방울처럼 무수한 봉분들이 튀어 오르고

이제 곧 서로의 등 뒤가 산인지 바다인지 구별할 수도

없어질 시간이 올 텐데

오늘도 잠깐 눈 한번 딱 감고 일어나면

그곳은 내일, 여느 작은 마을 앞바다, 뒷산, 너, 나

 

6.

 

너의 얼굴 뒤에 새파란 단두대처럼 바다가 놓여 있다

바다를 돌아보는 대신 너는 바다에 목을 맡기고

파도라는 칼날이 철컥철컥 쉴새 없이 내려쳐도

너는 아직도 이렇게 내 눈앞에 건재하고

그거면 됐지 싶었는데, 대신

너의 등 뒤에서 차갑고 날카로운 파도가 계속해서

강풍처럼 우리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우리가 마주한 테이블을 지구처럼 빙빙 돌린다

 

7.

 

저절로 자전하는 이 땅의 누구든 산이나 바다로 누군가를 보낸 적이 있다

 

계간 『리토피아』 2019년 겨울호 발표

 

 


 

 

김중일 시인 / 조금 식은 공기

 

 

한 사람의 체온이 꺼지자

공기의 온도가 아주 조금 떨어졌다

 

무게로 환산하면 몸에서 떨어진 눈썹 한 가닥 정도

부피로 환산하면 운동장에 떨어진 눈썹 한 가닥 정도

온도가 떨어졌다

 

식은 공기 한가운데서 인파를 향해 조용히 경고 카드를 내미는 신호등

눈금 같은 건널목을 사람들이 수은주처럼 오르내린다

 

도시의 톱니바퀴처럼 가로수 그늘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

맞물리며 도시를 가동시키는 그늘들

톱니바퀴 사이사이를 쓸고 닦고 기름치는 사람들이 있다

 

마모되어 떨어진 톱니 같은 낙엽을 끊임없이

톱니바퀴 바깥으로 쓸어내던 사람이

어느 날 순식간에 톱니바퀴 사이로 빨려들어 끼어 죽었다

그 순간 거리의 공기가 다시 조금 식었다

 

놀란 낙엽들이 새처럼 푸드덕 날아갔다

 

그의 후임자가 태양버튼을 꾹 누르자

작동되는 도시의 가로수 그늘들

햇빛이 반짝이처럼 뿌려진 아름답고 검은 톱니바퀴가 서서히 돌아간다

식은 공기가 조금씩 덥혀진다

 

계간 『리토피아』 2019년 겨울호 발표

 

 


 

김중일 시인

1977년 서울에서 출생.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가문비냉장고〉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국경꽃집』(창비, 2007)과 『아무튼 씨 미안해요』(창비, 2012), 『내가 살아갈 사람』(창비, 2015)이 있음. 2012년 신동엽문학상, 2013년 제3회 김구용시문학상, 2016년 제9회 시인광장문학상 수상. 현재 〈불편〉 동인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