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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시인 / 연가(戀歌)
아픈 머리에 열이 가라앉고 창마다 환하게 불빛 고이는 저녁 겨울 난롯불에 내 혼을 쬐며 고린도전서 13장을 펴면 내 진실의 계단 어디쯤서 너는 오고 있는가 어둠을 쓰러뜨리며 난롯불은 조금씩 내 피를 뎁히고 꿈틀이며 꿈틀이며 타고 있는 글자들
구름이 가는 곳을 묻고 싶은 황혼쯤 엉겅퀴 울타리를 밟고 가는 바람처럼 내 안에 서걱이는 한 무더기 공허 한 무더기 공허로도 비칠 수 없는 얼굴 불심지 휘감아도 살속 캄캄한 어둠 목구멍을 채우네
지구 가득 부신 햇빛 부려놓고 노을을 물들이는 태양이여, 산마루 넘어가는 태양이여, 눈은 눈으로 구름은 구름으로 떠나고 있을 때 나무들 우쭐대는 진종일 바람은 바람으로 만나고 있을 때 내 깊은 눈물샘 어디쯤서 물그르매 물그르매 번쩍이는 너
고정희 시인 / 전보
그대 이름 목젖에 아프게 걸린 날은 물 한잔에도 어질머리 실리고 술 한잔에도 토악질했다 먼 산 향하여, 으악으악 밤 깊도록 토악질했다
고정희 시인 / 파도타기
둥근 젖무덤에 보름달 떠올라 하룻밤 사무치자 하룻밤 사무치자 팔 벌린 그 밤에 동쪽 샘이 깊은 물에 보름달 주저앉은 그 밤에
느닷없는 부드러움이 두 가슴을 옥죄이던 그 밤에 깊고 푸른 밤이 불을 켜던 그 밤에 사십도의 강물이 범람하던 그 밤에
불꽃춤 찬란하던 그 밤에 서해안의 파도소리 하얗게 부서지던 그 밤에 물미역 아름답게 흔들리던 그 밤에 별들이 내려와 드러눕던 그 밤에
새벽 달빛 호호탕탕 넘어 가던 그 밤에 아아 아홉가지 봉황깃털 창궁에 자욱한 그 밤에 그대와 나 수미산 꼭대기에 떠올라 우주와 교신하던 그 밤에
고정희 시인 / 편지
새벽 다섯시면 수유리 옹달샘 표주박 속에 드맑게 드맑게 넘치고 있는 사람
드맑게 넘치다가 아침 나그네 목 축여주고 머나먼 마을로 떠나고 있는 사람
머나먼 마을로 떠나다가 인천 만석동이나 온양에 이르러 한 많은 사람들 발을 적시기도 하고 어린 물풀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없이 거대한 들판을 가로질러 까마득한 포구로 떠나고 있는 사람
떠날 수 없는 것들 뒤에 두고 바람처럼 깃발처럼 떠나고 있는 사람
아흐, 떠나면서 떠나면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
고정희 시인 / 포옹
사랑하는 사람이여 세모난 사람이나 네모난 사람이나 둥근 사람이나 제각기의 영혼 속에 촛불 하나씩 타오르는 이유 올리브 꽃잎으로 뚝뚝 지는 밤입니다
고정희 시인 / 하늘에 쓰네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하늘에 쓰네
내 먼저 그대를 사랑함은 더 나중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보다 더 먼저 즐거움의 싹을 땄기 때문이리니
가슴속 천봉에 눈물 젖는 사람이여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이여 끝남이 없으니 시작도 없는 곳 시작이 없으니 멈춤 또한 없는곳, 수련꽃만 희게 희게 흔들리는 연못가에 오늘은 봉래산 학수레 날아와 하늘 난간에 적상포 걸어놓고
달나라 광한전 죽지사 열두 대의 비파에 실으니 천산의 매화향이 이와 같으랴 수묵색 그리움 만리를 적시도다 만리에 서린 사랑 오악을 감싸도다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동트는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해지는 하늘에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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