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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정희 시인 /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2.

고정희 시인 /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

나는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고정희 시인 / 노여운 사랑

 

 

가을바람과 옷깃을 스친 뒤 세상이 지루하여

낮술을 마셨습니다

쨍그렁 소리가 나는 빈 술잔에 칸나꽃대 같은

노여움을 따라 부으며 꿈에 본 수미산도 잠기게 하고 날개

달린 낮 달도 띄워 당신 생각 단풍으로 아롱지도록 술잔을

채우고 또 채웠습니다

 

 


 

 

고정희 시인 / 따뜻한 동행

 

 

해거름녘 쓸쓸한 사람들과 흐르던

따뜻한 강물이 내게로 왔네

봄 눈 파릇파릇한 숲길을 지나

아득한 강물이 내게로 왔네

 

이십도의 따뜻하고 해맑은 강물과

이십도의 서늘하고 아득한 강물이

서로 겹쳐 흐르며 온누리 껴안으며

삼라의 뜻을 돌아 내게로 왔네

 

사흘 낮 사흘 밤 잔잔한 강물 속에

어여쁜 숭어떼 미끄럽게 춤추고

부드러운 물미역과 수초 사이에서

적막한 날들의 수문이 열렸네

 

늦게 뜬 별 둘이 살속에 박혔네

달빛이 내려와 이불로 덮혔네

저물 무렵 머나먼 고향으로 흐르던

따뜻한 강물이 내게, 내게로 왔네

외로운 사람들의 낮과 밤 지나

기나긴 강물이 내게, 내게로 왔네

 

사십도의 따뜻하고 드맑은 강물 위에

열 두 대의 가야금소리 깃들고

사십도의 서늘하고 아득한 강물 위에

스물 네 대의 바라춤이 실렸네

그 위에 우주의 동행이 겹쳤네.

 

 


 

 

고정희 시인 /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고정희 시인 / 베틀 노래

 

 

내 땀의 한 방울도 날줄에 스며

그대 영혼 감싸기에 따뜻하거라

고즈너기 풀어감은 고통의 실꾸리

한평생 오가는 만남의 잉아

우리님 생각과 실실이 짜여

새벽바람 막아줄 실비단이거라

기다리마 기다리마 기다리마

하루에도 열두 번 끊기는 실이여

무작정 풀리기엔 무서운 맘이거든

단번에 끝내기엔 아쉬운 밤이거든

허천들린 사랑가

평생 동안 불러주마

기다리다 흘린 눈물 모조리 스며

그대 아픔 덮어주는 비단길이거라

 

 


 

 고정희【高靜熙, 1948 ~ 1991. 6. 9】 시인

본명은 성애. 1948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한국신학대학 졸업. 1975년 《현대시학》 추천으로 등단. 교수 잡지사 기자 등을 거쳐 『또 하나의 문화』 창간 동인,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역임. 1991년 6월 지리산에서 실족사로 요절.  '목요시' 동인으로 오월 시인으로 활동.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광주의 눈물비』(1990), 『여성 해방 출사표』(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 등의 시집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