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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시인 /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 나는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고정희 시인 / 노여운 사랑
가을바람과 옷깃을 스친 뒤 세상이 지루하여 낮술을 마셨습니다 쨍그렁 소리가 나는 빈 술잔에 칸나꽃대 같은 노여움을 따라 부으며 꿈에 본 수미산도 잠기게 하고 날개 달린 낮 달도 띄워 당신 생각 단풍으로 아롱지도록 술잔을 채우고 또 채웠습니다
고정희 시인 / 따뜻한 동행
해거름녘 쓸쓸한 사람들과 흐르던 따뜻한 강물이 내게로 왔네 봄 눈 파릇파릇한 숲길을 지나 아득한 강물이 내게로 왔네
이십도의 따뜻하고 해맑은 강물과 이십도의 서늘하고 아득한 강물이 서로 겹쳐 흐르며 온누리 껴안으며 삼라의 뜻을 돌아 내게로 왔네
사흘 낮 사흘 밤 잔잔한 강물 속에 어여쁜 숭어떼 미끄럽게 춤추고 부드러운 물미역과 수초 사이에서 적막한 날들의 수문이 열렸네
늦게 뜬 별 둘이 살속에 박혔네 달빛이 내려와 이불로 덮혔네 저물 무렵 머나먼 고향으로 흐르던 따뜻한 강물이 내게, 내게로 왔네 외로운 사람들의 낮과 밤 지나 기나긴 강물이 내게, 내게로 왔네
사십도의 따뜻하고 드맑은 강물 위에 열 두 대의 가야금소리 깃들고 사십도의 서늘하고 아득한 강물 위에 스물 네 대의 바라춤이 실렸네 그 위에 우주의 동행이 겹쳤네.
고정희 시인 /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고정희 시인 / 베틀 노래
내 땀의 한 방울도 날줄에 스며 그대 영혼 감싸기에 따뜻하거라 고즈너기 풀어감은 고통의 실꾸리 한평생 오가는 만남의 잉아 우리님 생각과 실실이 짜여 새벽바람 막아줄 실비단이거라 기다리마 기다리마 기다리마 하루에도 열두 번 끊기는 실이여 무작정 풀리기엔 무서운 맘이거든 단번에 끝내기엔 아쉬운 밤이거든 허천들린 사랑가 평생 동안 불러주마 기다리다 흘린 눈물 모조리 스며 그대 아픔 덮어주는 비단길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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