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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혁희 시인 / 물고기 뱃속에는 바다가 없다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18.

권혁희 시인 / 물고기 뱃속에는 바다가 없다

 

 

  칼도마 위에서 민어가 눈깔을 굴리며

  칠테면 쳐봐! 빳빳한 비늘로 감싼 꼬리를

  휘영청 접어 올린다, 반달이 뜬다

  나는 식칼로 물고기 등판을 힘껏 내리친다

  토막 난 민어가 선홍색 아가미를 헐떡거리며

  남은 숨을 고른다, 달의 둘레가 툭 끊어진다

  잘못 건드린 물고기 뱃속에서 밀물이 터져 나오고

  부엌은 파도가 뒤집히는 요나의 바다가 된다

  그렇다, 남편의 희망은 내가 밥 잘 하는 여자가 되는 것이  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밥 냄새가 나고

  가스불 켜는 소리, 컵에 가득 물을 따르는 소리......

  물고기 뱃속에 들어있는 바다처럼

  내 머릿속에는 언제나 남편의 밥이 가득 들어있다

  밥이 소명이다

  숟가락을 달그락거리는 소리, 음식물을 씹어 삼키는 소리........

  수돗물을 펑펑 틀어 먹은 그릇을 닦을 때

  하복부에 세제 거품 같이 끓어오르는

  거북한 팽만감을 느낀다, 어제도 그랬다

  바닥부터 차오르는 바다로 가스레인지의 불이 꺼지고

  실내등이 이내 점멸한다

  캄캄한 고래 뱃속, 소리가 되지 않는 외마디 소리들이

  부력을 못이긴 플라스틱 그릇들과 함께 천정 높이까지 떠오른다

  복도의 맨 끝 집, 초인종을 눌러도 인기척이 없기 일쑤인

  그 집의 고요를 누가 의심할까

  그리하여 나는 칼집 많은 도마 위에서 마지막 숨을 고르던,

  뱃속의 바다를 다 쏟아낸 민어처럼

  36도 5부의 등판에서 비로소 남편의 밥을 내려놓는다

  개수대에 씻어둔, 밥이 되기는 다 틀린 쌀톨들이

  투항하듯 하얗게 흩어져 물속에 잠긴다

 

웹진 『시인광장』 2011년 10월호 발표

 

 


 

권혁희 시인

2003년 《문학·선》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