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송은숙 시인 / 죽을 먹으며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5.

송은숙 시인 / 죽을 먹으며

 

 

죽을 먹는다

때 아닌 진눈깨비 속수무책 맞고 있는

홍매 가지처럼

온몸이 아픈 날에는

흰 머리칼 같은 김, 한 올 한 올 불어대며

손끝에 얹힌 숟가락 무게를 골똘히 가늠하며

꽃의 혀는 언제 풀릴까 곁눈질 하며

죽을 먹는다

슴슴하고 심심한 흰 죽이

울컥울컥 목을 타고 넘어가

객귀를 물린다는 바가지처럼

뱃속 가득 둥글게 차오르던

그때 그 할머니는 소복을 입었던가

머리를 풀어헤쳤던가

부엌칼 같은 낮달이 공중에 떴던가

아랫목에 누운 오빠의 숨소리를 숨 죽여 엿듣다가

죽을 먹는다

쌀알을 한 톨 한 톨 세는 저작(詛嚼)

어느 새 눈은 멎고

죽, 죽 빗금 그으며 내리는 비

빗물에 말끔히 죽 그릇을 헹구고

입을 헹구고

탱탱 부풀어 오른 홍매의 잇속

종일 들여다보고 싶고

 

웹진 『시인광장』 2020년 3월호 발표

 

 


 

송은숙 시인

대전에서 출생. 충남대학교 사학과 졸업. 울산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수료. 2004년 《시사사》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돌 속의 물고기』, 『얼음의 역사』 가 있음. 현재 〈화요문학〉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