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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시인 / 강
내 가슴속 건너고 싶은 강 하나 있었네 오랜 싸움과 정처 없는 사랑의 탄식들을 데불고 인도 물소처럼 첨벙첨벙 그 강 건너고 싶었네 흐르다가 세상 밖 어느 숲 모퉁이에 서러운 등불 하나 걸어두고 싶었네.
곽재구 시인 / 겨울기행
춥고 서먹한 겨울이었다. 정미소 추녀 끝에 햇살을 쪼아대던 참새떼도 보기 힘들게 되었다 나무들의 언 손이 들녘의 한기를 부비는 식전 사격장을 향하는 우리들의 머리 위로 죽은 새들의 울음만 송이송이 흩어졌다 겨울 문틈으로 고드름만 간간이 떨어질 뿐 온수 한잔 어디서 마실 틈이 없었다 고향에서는 편지가 끊긴 지 오래였다 쇠죽 끓이는 가마 곁에서 산유화가 제일 좋다던 조카 공민학교 이학년에 편입한 그 녀석은 헌 시집처럼 눈물이 잦곤 했다 끝까지 시 공부를 할래 물으면 늘 부끄럽고 겸연쩍어하던 녀석 그 녀석도 이젠 다 커 읍내 박씨네 자전차포 점원이 되었다 춥고 서먹한 겨울이었다 사젹장을 향하는 우리들의 머리 위로 죽은 새들의 울음만 송이송이 흩어졌다.
곽재구 시인 / 구두 한 켤레의 시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구두 밑바닥에 고향의 저문 강물소리가 묻어 있다 겨울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에서 살얼음만 몇 발자국 밟고 왔는데 쑬골 상엿집 흰 눈 속을 넘을 때도 골목 앞 보세점 흐린 불빛 아래서도 찰랑찰랑 강물소리가 들린다 내 귀는 얼어 한 소절도 듣지 못한 강물소리를 구두 혼자 어떻게 듣고 왔을까 구두는 지금 황혼 뒤축의 꿈이 몇 번 수습되고 지난 가을 터진 가슴의 어둠 새로 누군가의 살아있는 오늘의 부끄러운 촉수가 싸리 유채 꽃잎처럼 꿈틀댄다 고향 텃밭의 허름한 꽃과 어둠과 구두는 초면 나는 구면 건성으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내게 고향은 꽃잎 하나 바람 한 점 꾸려주지 않고 영하 속을 흔들리며 떠나는 내 낡은 구두가 저문 고향의 강물소리를 들려준다. 출렁출렁 아니 덜그럭덜그럭.
곽재구 시인 / 권력
옛날에는 호박꽃도 아름다운 꽃이라고 말했던 친구가 패랭이꽃이나 민들레꽃도 진짜 아름다운 꽃이라고 말했던 친구가 갑자기 장미나 백합을 들먹이며 나머지 꽃들은 뽑아 없애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워커와 방패에 기름을 먹이며 자신이 끌려갔던 닭장차와 오랫동안 증오했던 최루탄발사기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아 참 단맛이구나 아 참 꿀맛이구나 적어도 5년은 그렇게 입맛을 쩝쩝일 것이었습니다.
곽재구 시인 / 귀촉도 금산에서
금산 농협 철선 타고 금진 포구 닿았습니다 대목 장꾼들 작은 갯마을로 사라진 뒤 날은 저물고 얼굴 까만 텃새 한 마리 집들의 봉창마다 저녁 햇살 한 토막 꽂았습니다 그리운 날은 멀고 보릿국 냄새에 길들여진 초저녁 별들이 사발 하나식 들고 긴 휘파람 불었습니다 면소의 중국음식점에서 자장면 한 그릇 훌훌 마시고 여인숙 찬 방에 허리 구부리면 어디선가 낯익은 고통의 울음소리 긴 밤 새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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