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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한용운 시인 / 길이 막혀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6.

한용운 시인 / 길이 막혀

 

 

당신의 얼굴은 달도 아니건만

산 넘고 물 넘어 나의 마음을 바칩니다.

 

나의 손길은 왜 그리 짧아서

눈앞에 보이는 당신의 가슴을 못 만지나요.

 

당신이 오기로 못 올 것이 무엇이며

내가 가기로 못 갈 것이 없지마는

산에는 사다리가 없고

물에는 배가 없어요.

 

뉘라서 사다리를 떼고 배를 깨뜨렸습니까.

나는 보석으로 사다리를 놓고 진주로 배 모아요.

오시려도 길이 막혀 못 오시는 당신을 기루어요.

 

 


 

 

한용운 시인 / 나의 길

 

 

이 세상에는 길도 많기도 합니다.

산에는 돌길이 있습니다. 바다에는

뱃길이 있습니다.

공중에는 달과 별의 길이 있습니다.

강가에서 낚시질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발자취를 냅니다.

들에서 나물 캐는 여자는 방초(芳草)를 밟습니다.

악한 사람은 죄의 길을 좇아갑니다.

의(義) 있는 사람은 옮은 일을 위하여

칼날을 밟습니다.

서산에 지는 해는 붉은 놀을 밟습니다.

봄 아침의 맑은 이슬은 꽃머리에서

미끄럼 탑니다.

그러나 나의 길은 이 세상에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님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죽음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것은 만일 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면

다른 길은 죽음의 길보다 험하고

괴로운 까닭입니다.

아아. 나의 길은 누가 내었습니까.

아아, 이 세상에는 님이 아니고는

나의 길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길을 님이 내였으면

죽음의 길은 왜 내셨을까요.

 

 


 

 

한용운 시인 / 나의 노래

 

 

나의 노래가락의 고저장단은 대중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속의 노래 곡조와는 조금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노래가 세속 곡조에

맞지 않는 것을 조금도 애달파하지 않습니다

나의 노래는 세속의 노래와 다르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까닭입니다

곡조는 노래의 결함을 억지로

조절하려는 것입니다

곡조는 부자연한 노래를 사람의

망상(妄想)으로 토막쳐 놓는 것입니다

참된 노래에 곡조를 붙이는 것은 노래의

자연에 치욕입니다

님의 얼굴에 단장을 하는 것이 도리어

흠이 되는 것과 같이 나의 노래에

곡조를 붙이면 도리어 결점이 됩니다

 

나의 노래는 사랑의 신(神)을 울립니다

나의 노래는 처녀의 청춘을 쥡짜서

보기도 어려운 맑은 물을 만듭니다

나의 노래는 님의 귀에 들어가서는

천국(天國)의 음악이 되고 님의 꿈에

들어가서는 눈물이 됩니다

 

나의 노래가 산과 들을 지나서 멀리 계신

님에게 들리는 줄을 나는 압니다

나의 노래가락이 바르르 떨다가 소리를

이르지 못할 때에 나의 노래가 님의

눈물겨운 고요한 환상으로 들어가서

사라지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압니다

나는 나의 노래가 님에게 들리는 것을

생각할 때에 광영(光榮)에 넘치는

나의 작은 가슴은 발발발 떨면서 침묵의

음보(音譜)를 그립니다

 

 


 

 

한용운 시인 / 당신은

 

 

당신은 나를 보면 왜 늘 웃기만 하셔요

당신의 찡그리는 얼굴을 좀 보고 싶은데

나는 당신을 보고 찡그리기는 싫어요

당신은 찡그리는 얼굴을

보기 싫어하실 줄을 압니다

그러나 떨어진 도화가 날아서 당신의

입술을 스칠 때에 나는 이마가

찡그려지는 줄도 모르고 울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금실로 수놓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만해 한용운 [卍海 韓龍雲 1879.8.29 ~ 1944.6.29] 시인

1879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 1918년 월간지 『유심』을 발간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주로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구제를 노래했음. 3.1운동 당시에는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피검되어 3년간의 옥고 치름.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독립사상의 고취에 힘을 기울였으며, 1944년 입적. 조선의 불교계 및 독립운동에 지대한 업적을 남겨,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 수여되고 1967년 탑골 공원에 용운당만해대선사비가 건립됨.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 외에 『조선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정선강의채근담』 등이 있으며 사후에『한용운전집』, 『한용운시전집』이 간행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