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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한용운 시인 / 사랑의 불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7.

한용운 시인 / 사랑의 불

 

 

산천초목(山川草木)에 붙는 불은

수인씨(燧人氏)가 내셨습니다

청춘의 음악에 무도(舞蹈)하는 나의 가슴을

태우는 불은 가는 님이 내셨습니다

 

촉석루를 안고 돌며 푸른 물결의 그윽한 품에

논개(論介)의 청춘을 자매우는 남강(南江)의

흐르는 물아 모란봉의 키스를 받고

계월향(桂月香)의 무정(無情)을 저주하면서

능라도(綾羅島)를 감돌아 흐르는 실연자(失戀者)인

대동강아 그대들의 권위로도 애태우는 불은

끄지 못할 줄을 번연히 알지마는 입버릇으로

불러 보았다

만일 그대 네가 쓰리고 아픈 슬픔으로 졸이다가

폭발되는 가슴 가운데의 불을 끌 수가 있다면

그대들의 님 기루운 사랑을 위하여

노래를 부를 때에 이따금 이따금 목이 메어

소리를 이루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남들이 볼 수 없는 그대네의 가슴속에서

애태우는 불꽃이 거꾸로 타들어 가는 것을 나는 본다

 

오오 님의 정열의 눈물과 나의 감격의 눈물이

마주 닿아서 합류(合流)가 되는 때에

그 눈물의 첫방울로 나의 가슴의 불을 끄고

그 다음 방울을 그대네의 가슴에 뿌려 주리라

 

 


 

 

한용운 시인 / 여름밤이 길어요

 

 

당신이 계실 때에는 겨울밤이 쩌르더니

당신이 가신 뒤에는 여름밤이 길어요

책력의 내용이 그릇되었나 하였더니

개똥 불이 흐르고 벌레가 웁니다

긴 밤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긴 밤은 근심바다의 첫 물결에서 나와서

슬픈 음악이 되고 아득한 사막이 되더니

필경 절망의 성(城) 너머로 가서 악마의

웃음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당신이 오시면 나는 사랑의 칼을 가지고

긴 밤을 깨어서 일천(一千) 토막을 내겠습니다

당신이 계실 때는 겨울밤이 쩌르더니

당신이 가신 뒤는 여름밤이 길어요

 

 


 

 

한용운 시인 / 잠 없는 꿈

 

 

나는 어느 날 밤에 잠 없는 꿈을 꾸었습니다.

나의 님은 어디 있어요.

나는 님을 보러 가겠습니다.

님에게 가는 길을 가져다가 나에게 주셔요,

님이여.

너의 가려는 길은 너의 님의 오려는 길이다.

그 길을 가져다 너에게 주면 너의

님은 올 수가 없다.

내가 가기만 하면 님은 아니 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너의 님의 오려는 길을 너에게 갖다 주면

너의 님은 다른 길로 오게 된다.

네가 간대도 너의 님을 만날 수가 없다.

그러면 그 길을 가져다가 나의 님에게 주셔요.

너의 님에게 주는 것이 너에게 주는 것과 같다.

사람마다 저의 길이 각각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야 이별한 님을 만나 보겠습니까.

네가 너를 가져다가 너의 가려는 길에 주어라.

그리 하고 쉬지 말고 가거라.

그리 할 마음은 있지마는 그 길에는

고개도 많고 물도 많습니다. 갈

수가 없습니다.

꿈은 그러면 너의 님을 너의 가슴에

안겨주마 하고 나의 님을 나에게 안겨주었습니다.

 

나는 나의 님을 힘껏 껴안았습니다.

나의 팔이 나의 가슴을 아프도록 다칠 때에

나의 두 팔에 베어진 허공은 나의 팔을 뒤에

두고 이어졌습니다.

 


 

만해 한용운 [卍海 韓龍雲 1879.8.29 ~ 1944.6.29] 시인

1879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 1918년 월간지 『유심』을 발간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주로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구제를 노래했음. 3.1운동 당시에는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피검되어 3년간의 옥고 치름.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독립사상의 고취에 힘을 기울였으며, 1944년 입적. 조선의 불교계 및 독립운동에 지대한 업적을 남겨,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 수여되고 1967년 탑골 공원에 용운당만해대선사비가 건립됨.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 외에 『조선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정선강의채근담』 등이 있으며 사후에『한용운전집』, 『한용운시전집』이 간행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