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노천명 시인 / 내 가슴에 장미를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8.

노천명 시인 / 내 가슴에 장미를

 

 

더불어 누구와 얘기할 것인가

거리에서 나는 사슴모양 어색하다

 

나더러 어떻게 노래를 하라느냐

시인은 카나리아가 아니다

 

제멋대로 내버려두어다오

노래를 잊어버렸다고 할 것이냐

 

밤이면 우는 나는 두견!

내 가슴속에도 들장미를 피워다오

 

 


 

 

노천명 시인 / 새해 맞이

 

 

구름장을 찢고 화살처럼 퍼지는

새 날빛의 눈부심이여

 

'설'상을 차리는 다경(多慶)한 집 뜰 안에도---

나무판자에 불을 지르고 둘러앉은

걸인들의 남루 위에도

자비로운 빛이여

 

새해 늬는

숱한 기막힌 역사를 삼켰고

위대한 역사를 복중(腹中)에 뱄다

 

이제

우리 늬게

푸른 희망을 건다

아름다운 꿈을 건다

 

 


 

 

노천명 시인 / 성탄

 

 

메시아가 세상에 오시는 새벽

어두운 밤을 헤치는 성탄의 노랫소리

집집이 불빛 찬란히 흐르고

사람들 메마름 가슴에 즐거움 깃들였나니

형제여 메리 크리스마스!

 

인류 구속(救贖)하러 오시는 왕의 왕

베들레헴 가난한 집 마구간으로

겸손히 오신 날

당신의 고초스러운 생---

가시관에 쓴 잔이 약속된 날이어니

 

땅 위의 영광을 당신에게 돌리나이다

가슴속 헤치며 드는 저 성당 종소리

탕자도 도둑도 당신의 죄 많은 아들들이

성당이 첨탑을 우러러보며 십자를 긋습니다

 

오는 이 나라 겨레들은

또 하나의 이스라엘 백성

 

저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소서

주여 외로운 이들에게 강복(降福)하소서

당신의 축복은 우리에게 있어야겠나이다

 

 


 

 

노천명 시인 / 언덕

 

 

창으로 하늘이 들어온다

눈만 뜨면 내다보는 언덕

소나무가 서너 개 아무것도 없다.

오늘도 소나무가 서너 개 아무것도 안 뵌다.

 

방 안 풍경이 보기 싫어

온 종일 언덕을 바라본다.

사람이 지나가면 눈이 다 밝아진다.

 

전봇대모양 우뚝 선 사람이 둘

혹시 나 아는 이 아닐까

 

가슴이 답답하면 언덕을 본다.

눈물이 나면 언덕을 본다.

이방인 같아 쓸쓸하면 언덕을 본다.

언니랑 조카가 보고프면 언덕을 본다.

 

 


 

노천명[盧天命, 1912.9.2∼1957.12.10]  시인

1912년 황해도의 장연(長淵)에서 출생.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 졸업. 이화여전 재학 때인 1932년 《신동아》 6월호에 〈밤의 찬미(讚美)>  를 발표하며 데뷔. 저서로는 시집으로 1938년 초기의 작품 49편을 수록한 제1시집 『산호림(珊瑚林)』, 향토적 소재를 무한한 애착을 가지고 노래한 〈남사당(男寺黨)>, 〈춘향>,  〈푸른 5월>  등이 수록된 1945년 2월 출간된  제2시집 『창변(窓邊)』 6·25전쟁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해 문학가동맹에 가담한 죄로 부역 혐의를 받고 일시 투옥되어 옥중시와 출감 후의 착잡한 심정을 노래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 1953년  출간된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와 수필집으로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生活白書)』 등이 있음. 1957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