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진 시인 / 가을 당신에게
내가 당신으로부터 달아나는 속도와 거리는, 당신이 내게로 오시는 거리와 속도에 미치지 못합니다. 내 손에 묻어 있는 이 시대의 붉은 피를 씻을 수 있는 푸른 강물, 그 강물까지 가는 길목 낙엽 위에 앉아 계신, 홀로이신 당신 앞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별에까지 들리고, 달에까지 들리고, 가슴속이 핑핑 도는 혼자만의 울음, 침묵보다 더 깊은 눈물 듣고 계시는, 홀로 만의 당신 앞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박두진 시인 / 겨울 나무 너
카랑카랑 강추위
빈 들에 혼자 서서 혼자서 너는 떨고 있다.
몸뚱어리 가지 온통, 오들오들 떨고 있다.
파아랗게 얼은 하늘 서리 엉긴 이마,
마지막 한 잎까지 훌훌 떨린 채 알몸으로 발돋움해 손을 젓고 있다.
영에 얼사 부둥켰던 우리들의 영원, 활활 달턴 뜨거움,
해의 나라 달의 나라별의 나라 모두 불러보는 이름들의 듣고 싶은 음성,
벌에 혼자 너만 서서 울음 울고 있다.
박두진 시인 / 꽃사슴
꽃이김에 모가지가 난만해져 있었다.
피 뻗혀 서른 울음.
간만에 極光(극광) 하나 피고 있었다.
넋이는 고운 칠색.
金剛(금강)에, 金剛에,
푸른 물이 눈동자를 씻고 있었다.
입 한번 다물으면 영원한 침묵.
두 뿔은 먼 星座(성좌)에 걸어 놓고,
네 굽, 네 굽,
까만 굽이 山줄기를 뛰고 있었다.
白樺(백화) 하얀 山崍(산내).
방울방울 땅에 젖어 꽃피 淋?(임리) 떨구며,
골골을 못 잊어워 울어예는 사슴.
한밤에, 한밤에,
모가지가 꽃에 척척 이겨지고 있었다.
박두진 시인 / 너는
눈물이 글성대면, 너는 물에 씻긴 흰 달. 달처럼 화안하게 내 앞에 떠서 오고,
마주 오며 웃음지면, 너는 아침 뜰 모란꽃, 모란처럼 활짝 펴 내게로 다가오고,
바닷가에 나가면, 너는 싸포오 푸를 듯이 맑은 눈 퍼져 내린 머리털 알 빛같이 흰 몸이 나를 부르고, 달아나며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푸른 숲을 걸으면, 너는 하얀 깃 비둘기. 구구구 내 가슴에 파고들어 안긴다. 아가처럼 볼을 묻고 구구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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