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곽재구 시인 / 그리운 남쪽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6.

곽재구 시인 / 그리운 남쪽

 

 

그곳은 어디인가

바라보면 산모퉁이

눈물처럼 진달래꽃 피어나던 곳은

우리가 매듭 굵은 손을 모아

여어이 여어이 부르면

여어이 여어이 눈물 섞인 구름으로

피맺힌 울음들이 되살아나는 그곳은

돌아보면 날 저물어 어둠이 깊어

홀로 누워 슬픔이 되는 그리운 땅에

오늘은 누가 정 깊은

저 뜨거운 목마름을 던지는지

아느냐 젊은 시인이여

눈뜨고 훤히 보이는 백일의

이 땅의 어디에도

가을바람 불면 가을바람 소리로

봄바람 일면 푸른 봄바람 소리로

강냉이 풋고추

눈 속의 겨울 애벌레와도 같은

죽지 않는 이 땅의 서러운 힘들이

저 숨죽인 그리움의 밀물소리로

우리 쓰러진 가슴 위에 피어나고 있음을

 

 


 

 

곽재구 시인 / 기다림

 

 

이른 새벽

강으로 나가는 내 발걸음에는

아직도 달콤한 잠의 향기가 묻어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 중

눈빛 초롱하고 허리통 굵은 몇 올을 끌어다

눈에 생채기가 날 만큼 부벼댑니다.

지난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강둑에 매인 채 출렁이고

작은 물새 두 마리가 해 뜨는 쪽을 향하여

힘차게 날아갑니다.

사랑하는 이여,

설령 당신이 이 나루터를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내 기다림은 끝나지 않습니다.

설레이는 물살처럼 내 마음

설레이고 또 설레입니다.

 

 


 

 

곽재구 시인 / 깡통

 

 

아이슬랜드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

TV가 나오지 않는 날 있단다

매주 목요일에는

국민들이 독서와 음악과

야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국영 TV가 앞장을 서

세심한 문화 정책을 편단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앉은

우리나라 TV에는

이제 갓 열여덟 소녀 가수가

선정적 율동으로 오늘밤을 노래하는데

스포츠 강국 선발 중진국 포스트모더니즘

끝없이 황홀하게 이어지는데

재벌 2세와 유학 나온 패션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말 연속극에 넋 팔고 있으면

아아 언젠가 우리는

깡통이 될지도 몰라

함부로 짓밟히고 발길에 채여도

아무 말 못 하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주민증 번호와 제조 일자가 나란히 적힌

찌그러진 깡통이 될지도 몰라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곽재구 시인 / 나무

 

 

숲 속에는

내가 잘 아는

나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나무들 만나러

날마다 숲 속으로 들어갑니다

제일 키 큰 나무와

제일 키 작은 나무에게

나는 차례로 인사를 합니다.

먼 훗날 당신도

이 숲길로 오겠지요

내가 동무 삼은 나무들을 보며

그때 당신은 말할 겁니다

이렇게 등이 굽지 않은

言語(언어)들은 처음 보겠구나

이렇게 사납지 않은

마음의 길들은 처음 보겠구나

 

 


 

 

곽재구 시인 / 돌점 치는 여자

 

 

그 여자와 나는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만났습니다

이스크쿨이라는 이름의 호수가

천산의 맑은 눈망울을 떨구고 있는 땅

그 여자가 돌 몇 개를 굴려

내 인생의 앞날을 읽어주었습니다

나 두 귀 쫑긋거리며

또르르 또르르 물방울처럼 굴러 나가는

내 인생의 마른 풀숲 하나 보았습니다

어디선가 썩어 문드러질 육신

죽어 지옥을 방황한 영혼

그 여자의 점괘들이

비비새의 울음소리가 되어

저물녁 사과나무 가지에 걸렸습니다

그 날 밤 이스크쿨 호수의 수면 위에

육탈이 덜 된 한 사내의 뼈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바람도 되지 못하고

꽃도 되지 못하고

더더욱 새는 꿈꾸지 못한

한 사내의 이름이 작은 물살 되어

천산의 기슭까지 천천히 밀려 나갔습니다

 

 


 

곽재구(郭在九) 시인

1954년 전남 광주 출생. 전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숭실대학교 대학원. 1981년 중앙 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주로 민중의 삶에 대한 애정을 애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썼다. 시집으로는 '사평역에서'(1983), '서울 세노야'(1990),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1999) 등이 있다.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 1996 제9회 '동서문학상'. 1986 계간지 '시와 사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