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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시인 / 그리운 남쪽
그곳은 어디인가 바라보면 산모퉁이 눈물처럼 진달래꽃 피어나던 곳은 우리가 매듭 굵은 손을 모아 여어이 여어이 부르면 여어이 여어이 눈물 섞인 구름으로 피맺힌 울음들이 되살아나는 그곳은 돌아보면 날 저물어 어둠이 깊어 홀로 누워 슬픔이 되는 그리운 땅에 오늘은 누가 정 깊은 저 뜨거운 목마름을 던지는지 아느냐 젊은 시인이여 눈뜨고 훤히 보이는 백일의 이 땅의 어디에도 가을바람 불면 가을바람 소리로 봄바람 일면 푸른 봄바람 소리로 강냉이 풋고추 눈 속의 겨울 애벌레와도 같은 죽지 않는 이 땅의 서러운 힘들이 저 숨죽인 그리움의 밀물소리로 우리 쓰러진 가슴 위에 피어나고 있음을
곽재구 시인 / 기다림
이른 새벽 강으로 나가는 내 발걸음에는 아직도 달콤한 잠의 향기가 묻어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 중 눈빛 초롱하고 허리통 굵은 몇 올을 끌어다 눈에 생채기가 날 만큼 부벼댑니다. 지난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강둑에 매인 채 출렁이고 작은 물새 두 마리가 해 뜨는 쪽을 향하여 힘차게 날아갑니다. 사랑하는 이여, 설령 당신이 이 나루터를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내 기다림은 끝나지 않습니다. 설레이는 물살처럼 내 마음 설레이고 또 설레입니다.
곽재구 시인 / 깡통
아이슬랜드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 TV가 나오지 않는 날 있단다 매주 목요일에는 국민들이 독서와 음악과 야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국영 TV가 앞장을 서 세심한 문화 정책을 편단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앉은 우리나라 TV에는 이제 갓 열여덟 소녀 가수가 선정적 율동으로 오늘밤을 노래하는데 스포츠 강국 선발 중진국 포스트모더니즘 끝없이 황홀하게 이어지는데 재벌 2세와 유학 나온 패션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말 연속극에 넋 팔고 있으면 아아 언젠가 우리는 깡통이 될지도 몰라 함부로 짓밟히고 발길에 채여도 아무 말 못 하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주민증 번호와 제조 일자가 나란히 적힌 찌그러진 깡통이 될지도 몰라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곽재구 시인 / 나무
숲 속에는 내가 잘 아는 나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나무들 만나러 날마다 숲 속으로 들어갑니다 제일 키 큰 나무와 제일 키 작은 나무에게 나는 차례로 인사를 합니다. 먼 훗날 당신도 이 숲길로 오겠지요 내가 동무 삼은 나무들을 보며 그때 당신은 말할 겁니다 이렇게 등이 굽지 않은 言語(언어)들은 처음 보겠구나 이렇게 사납지 않은 마음의 길들은 처음 보겠구나
곽재구 시인 / 돌점 치는 여자
그 여자와 나는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만났습니다 이스크쿨이라는 이름의 호수가 천산의 맑은 눈망울을 떨구고 있는 땅 그 여자가 돌 몇 개를 굴려 내 인생의 앞날을 읽어주었습니다 나 두 귀 쫑긋거리며 또르르 또르르 물방울처럼 굴러 나가는 내 인생의 마른 풀숲 하나 보았습니다 어디선가 썩어 문드러질 육신 죽어 지옥을 방황한 영혼 그 여자의 점괘들이 비비새의 울음소리가 되어 저물녁 사과나무 가지에 걸렸습니다 그 날 밤 이스크쿨 호수의 수면 위에 육탈이 덜 된 한 사내의 뼈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바람도 되지 못하고 꽃도 되지 못하고 더더욱 새는 꿈꾸지 못한 한 사내의 이름이 작은 물살 되어 천산의 기슭까지 천천히 밀려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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