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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곽재구 시인 / 두 사람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7.

곽재구 시인 / 두 사람

 

 

자전거 두 대가

나란히 꽃길을 지나갑니다.

바퀴살에 걸린

꽃 향기들이 길 위에

떨어져 반짝입니다.

 

나 그들을

가만히 불러 세웠습니다.

내가 아는 하늘의 길 하나

그들에게 일러 주고 싶었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불러 놓고 그들의 눈빛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는 길보다

더 아름다운 길을 그들이

알고 있을 것만 같아서

불러서 세워 놓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곽재구 시인 / 들국화

 

 

사랑의 날들이

올 듯 말 듯

기다려온 꿈들이

필 듯 말 듯

그래도 가슴속에 남은

당신의 말 한마디

하루종일 울다가

무릎걸음으로 걸어간

절벽 끝에서

당신은 하얗게 웃고

오래 된 인간의 추억 하나가

한 팔로 그 절벽에

끝끝내 매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곽재구 시인 / 따뜻한 편지

 

 

당신이 보낸 편지는

언제나 따뜻합니다

물푸레나무가 그려진

10전짜리 우표 한 장도 붙어 있지 않고

보낸 이와 받는 이도 없는

그래서 밤새워 답장을 쓸 필요도 없는

그 편지가

날마다 내게 옵니다

겉봉을 여는 순간

잇꽃으로 물들인

지상의 시간들 우수수 쏟아집니다

그럴 때면 내게 남은

모국어의 추억들이 얼마나 흉칙한지요

눈이 오고

꽃이 피고

당신의 편지는 끊일 날 없는데

버리지 못하는 지상의 꿈들로

세상 밖을 떠도는 한 사내의

퀭한 눈빛 하나 있습니다

 

 


 

 

곽재구 시인 / 땅 끝에 와서

 

 

황사바람 이는 땅끝에 와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말보다 먼저

한 송이 꽃을 바치고 싶었다

반편인 내가 반편인 너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히죽 웃으면서

묵묵히 쏟아지는 모래바람을 가슴에 안으며

너는 결국 아무런 말도 없고

다시는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은 바위 앞에서

남은 북쪽 땅끝을 보여주겠다고 외치고 싶었다

해안선을 따라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아우성 소리 끊임없이 일어서고

엉겨 붙은 돌따개비 끝없는 주검 앞에서

사랑보다도 실존보다도 던져 오는

뜨거운 껴안음 하나를 묵도하고 싶었다

더 지껄여 무엇하리 부끄러운 반편의 봄

구두 벗고 물살에 서 있으니

두 눈에 푸르른 강물 고여 온다

언제 다시 이 바다에서 우리 참됨을 얘기하리

언제 다시 이 땅끝에서 우리 껴안아 함께 노래하리

뒹굴다가 뒹굴다가 다투어 피어나는 불빛 진달래 되리

 

 


 

 

곽재구 시인 / 또 다른 사랑

 

 

보다 더 자유

스러워지기 위하여

꽃이 피고

보다 더 자유

스러워지기 위하여

밥을 먹는다

함께 살아갈 사람들

세상 가득한데

또 다른 사랑 무슨 필요 있으리

문득 별 하나 뽑아 하늘에 던지면

쨍하고 가을이 운다

 

 


 

곽재구(郭在九) 시인

1954년 전남 광주 출생. 전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숭실대학교 대학원. 1981년 중앙 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주로 민중의 삶에 대한 애정을 애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썼다. 시집으로는 '사평역에서'(1983), '서울 세노야'(1990),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1999) 등이 있다.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 1996 제9회 '동서문학상'. 1986 계간지 '시와 사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