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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곽재구 시인 / 마음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28.

곽재구 시인 / 마음

 

 

나무와

나무 사이 건너는

 

이름도 모르는

바람 같아서

 

가지와

가지 사이 건너며

 

슬쩍 하늘의 초승달

하나만 남겨 두는

새와 같아서

 

나는 당신을

붙들어매는

울음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한 번 떠나간

나루터의

낡은 배가 될 수 없습니다

 

 


 

 

곽재구 시인 / 묵언 1

 

 

한 고독이

한 고독을 눌러 죽이고

새로운 고독이 태어납니다

그러한 때

나는 패배자가 된

고독의 옆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승리자가 된 고독의

빛나는 웃음도 볼 수 없습니다

 

한 고독이

한 고독을 눌러 죽이고

서러운 고독이 태어납니다

그 빛나는 탄생의 신비 앞에서

한 햇빛이

다른 햇빛을 돌로 쳐 죽이는

끔찍한 모습을 만나기도 합니다.

 

묵언 2

소금밭에서

 

한 고독이

한 고독을 눌러 죽이고

새로운 고독이 태어납니다

그러한 때

나는 패배자가 된

고독의 옆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승리자가 된 고독의

빛나는 웃음도 볼 수 없습니다

 

한 고독이

한 고독을 눌러 죽이고

서러운 고독이 태어납니다

그 빛나는 탄생의 신비 앞에서

한 햇빛이

다른 햇빛을 돌로 쳐죽이는

끔찍한 모습을 만나기도 합니다

 

 


 

 

곽재구 시인 / 바람소리

 

 

새미골

이 첨지는

올 겨울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가

자꾸만 서러웁다네

 

댓잎 속에

깃을 친 겨울새들

살 부비며 함박눈 날리는 하늘로

촤 솟아오를 때

 

아랫집

길주할멈

스무 살 청상이 된

눈빛 참 맑은 가시내

쇠죽 쑤는

이 첨지 곁 다가와

아궁이에 마른 솔잎 한줌 던져주기도 하다가

혜산선 기차 타고 삼수갑산 원족가던 여학교 때 이야기도 하다가

 

콜록콜록 눈 속에 파묻힌 고향집들

그날의 그리움들 불빛 속에 떠올리기도 하다가

기침소리 끝나면

눈벙거지 쓴 장독대 곁에 서서

오래오래 북녘 땅 바라봅니다

 

내일 모레가 설날인데

눈이 펑펑 곱게도 오는데

그리운 사람들의 기척도 들리지 않고

오십 년 기다림의 바람소리만

서러운 댓잎을 스쳐갑니다.

 

 


 

 

곽재구 시인 / 바람이 좋은 저녁

 

 

내가 책을 읽는 동안

새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바람은 내 어깨 위에

자그만 그물침대 하나를 매답니다.

 

마침

내 곁을 지나가는 시간들이라면

누구든지 그 침대에서

푹 쉬어갈 수 있지요.

 

그 중에 어린 시간 하나는

나와 함께 책을 읽다가

성급한 마음에 나보다도 먼저

책장을 넘기기도 하지요.

 

그럴 때 나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바람이 좋은 저녁이군, 라고 말합니다.

어떤 어린 시간 하나가

내 어깨 위에서

깔깔대고 웃다가 눈물 한 방울

툭 떨구는 줄도 모르고.

 

 


 

곽재구(郭在九) 시인

1954년 전남 광주 출생. 전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숭실대학교 대학원. 1981년 중앙 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주로 민중의 삶에 대한 애정을 애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썼다. 시집으로는 '사평역에서'(1983), '서울 세노야'(1990),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1999) 등이 있다.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 1996 제9회 '동서문학상'. 1986 계간지 '시와 사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