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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시인 / 마음
나무와 나무 사이 건너는
이름도 모르는 바람 같아서
가지와 가지 사이 건너며
슬쩍 하늘의 초승달 하나만 남겨 두는 새와 같아서
나는 당신을 붙들어매는 울음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한 번 떠나간 나루터의 낡은 배가 될 수 없습니다
곽재구 시인 / 묵언 1
한 고독이 한 고독을 눌러 죽이고 새로운 고독이 태어납니다 그러한 때 나는 패배자가 된 고독의 옆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승리자가 된 고독의 빛나는 웃음도 볼 수 없습니다
한 고독이 한 고독을 눌러 죽이고 서러운 고독이 태어납니다 그 빛나는 탄생의 신비 앞에서 한 햇빛이 다른 햇빛을 돌로 쳐 죽이는 끔찍한 모습을 만나기도 합니다.
묵언 2 소금밭에서
한 고독이 한 고독을 눌러 죽이고 새로운 고독이 태어납니다 그러한 때 나는 패배자가 된 고독의 옆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승리자가 된 고독의 빛나는 웃음도 볼 수 없습니다
한 고독이 한 고독을 눌러 죽이고 서러운 고독이 태어납니다 그 빛나는 탄생의 신비 앞에서 한 햇빛이 다른 햇빛을 돌로 쳐죽이는 끔찍한 모습을 만나기도 합니다
곽재구 시인 / 바람소리
새미골 이 첨지는 올 겨울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가 자꾸만 서러웁다네
댓잎 속에 깃을 친 겨울새들 살 부비며 함박눈 날리는 하늘로 촤 솟아오를 때
아랫집 길주할멈 스무 살 청상이 된 눈빛 참 맑은 가시내 쇠죽 쑤는 이 첨지 곁 다가와 아궁이에 마른 솔잎 한줌 던져주기도 하다가 혜산선 기차 타고 삼수갑산 원족가던 여학교 때 이야기도 하다가
콜록콜록 눈 속에 파묻힌 고향집들 그날의 그리움들 불빛 속에 떠올리기도 하다가 기침소리 끝나면 눈벙거지 쓴 장독대 곁에 서서 오래오래 북녘 땅 바라봅니다
내일 모레가 설날인데 눈이 펑펑 곱게도 오는데 그리운 사람들의 기척도 들리지 않고 오십 년 기다림의 바람소리만 서러운 댓잎을 스쳐갑니다.
곽재구 시인 / 바람이 좋은 저녁
내가 책을 읽는 동안 새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바람은 내 어깨 위에 자그만 그물침대 하나를 매답니다.
마침 내 곁을 지나가는 시간들이라면 누구든지 그 침대에서 푹 쉬어갈 수 있지요.
그 중에 어린 시간 하나는 나와 함께 책을 읽다가 성급한 마음에 나보다도 먼저 책장을 넘기기도 하지요.
그럴 때 나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바람이 좋은 저녁이군, 라고 말합니다. 어떤 어린 시간 하나가 내 어깨 위에서 깔깔대고 웃다가 눈물 한 방울 툭 떨구는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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