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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곽재구 시인 / 은행나무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31.

곽재구 시인 / 은행나무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

늙은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

맑은 바람결에 너는 짐짓

네 빛나는 눈썹 두어 개를 떨구기도 하고

누군가 깊게 사랑해온 사람들을 위해

보도 위에 아름다운 연서를 쓰기도 한다

신비로워라 잎사귀마다 적힌

누군가의 옛 추억들 읽어가고 있노라면

사랑은 우리들의 가슴마저 금빛 추억의 물이 들게 한다

아무도 이 거리에서 다시 절망을 노래할 수 없다

벗은 가지 위 위태하게 곡예를 하는 도롱이집 몇 개

때로는 세상을 잘못 읽은 누군가가

자기 몫의 도롱이집을 가지 끝에 걸고

다시 이 땅 위에 불법으로 들어선다 해도

수천만 황인족의 얼굴 같은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희망 또한 불타는 형상으로 우리 가슴에 찍힐 것이다

 

 


 

 

곽재구 시인 / 절망을 위하여

 

 

바람은 자도 마음은 자지 않는다

철들어 사랑이며 추억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

싸움은 동산 위의 뜨거운 해처럼 우리들의 속살을 태우고

마음의 배고픔이 출렁이는 강기슭에 앉아

종이배를 띄우며 우리들은 절망의 노래를 불렀다

정이 들어 이제는 한 발짝도 떠날 수 없는 이 땅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머리 위를 짓밟고 간

많고 많은 이방의 발짝 소리를 들었다

아무도 이웃에게 눈인사를 하지 않았고

누구도 이웃을 위하여 마음을 불태우지 않았다

어둠이 내린 거리에서 두려움에 떠는

눈짓으로 술집을 떠나는 사내들과

두부 몇 모를 사고 몇 번씩 뒤돌아보며

골목을 들어서는 계집들의 모습이

이제는 우리들의 낯선 슬픔이 되지 않았다

사랑은 가고 누구도 거슬러오르지 않는

절망의 강기슭에 배를 띄우며

우리들은 이 땅의 어둠 위에 닻을 내린

많고 많은 풀포기와 별빛이고자 했다.

 

 


 

 

곽재구 시인 / 참 맑은 물살

 

 

참 맑은 물살

발가락 새 헤적이네

애기 고사리순 좀 봐

사랑해야 할 날들

지천으로 솟았네

어디까지 가나

부르면 부를수록

더 뜨거워지는 너의 이름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 몸 되어 흐르는

눈물나는 저들 연분홍 사랑 좀 봐.

 

 


 

 

곽재구 시인 / 첫눈 오는 날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 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계단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킨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 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곽재구(郭在九) 시인

1954년 전남 광주 출생. 전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숭실대학교 대학원. 1981년 중앙 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주로 민중의 삶에 대한 애정을 애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썼다. 시집으로는 '사평역에서'(1983), '서울 세노야'(1990),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1999) 등이 있다.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 1996 제9회 '동서문학상'. 1986 계간지 '시와 사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