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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향림 시인 / 마루
마른 걸레로 거실을 닦으며 얇게 묻은 권태와 시간을 박박 문질러 닦으며 미국산 수입 자작나무를 깐 세 평의 근심 걱정을 닦으며 지구 저쪽의 한밤중 누워 잠든 조카딸의 잠도 소리 없이 닦아 준다. 다 해진 내 영혼의 뒤켠을 소리 없이 닦아 주는 이는 누구일까. 그런 걸레 하나쯤 갖고 있는 이는 누구일까.
노향림 시인 / 새들은 길을 트며 날아간다
기르던 한 쌍의 새가 날아간 빈 새장엔 피 배인 햇살이 툭툭 떨어져 나뒹글고 뾰족한 부리로 낟알만큼씩 쪼아댄 시간들이 모이통과 함께 한구석에 넘어져 있다 까마득히 날아간 새들이 숨쉬었던 흔적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허공을 뚫고 누구도 넘보지 않을 더 먼 곳 바람만 재빨리 누웠다 일어서는 곳 모든 새들은 온몸으로 길을 트며 날아간다 좁쌀만 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지상은 언제나 원근법의 깊은 아름다움이 파인 3D SF 화면처럼 반짝인다 어느 곳은 연둣빛 어느 곳은 바다 빛 어는 곳은 눈물 빛
노향림 시인 / 어느 거장의 죽음
낡은 마하 피아노가 전 재산이다 키가 유난히 작고 등이 굽은 피아니스트 그는 오래전부터 수전증을 앓고 있다. 연주 때마다 활짝 열리는 피아노 뚜껑 그 밑 낭떠러지 같은 외길이 드러나고 가는 막대 하나가 파르르 떨린다. 어디선가 가는 발목의 새들이 무더기로 날아들고 연미복 입은 그의 죽지 속에 편안히 안긴다. 새의 부리는 길고 날카롭다. 건반 위에서 무시로 떨리는 손 쾅쾅 마하 광속으로 튀는 빛으로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을 연주할 땐 어느덧 새들은 허공으로 날아가고 없다. 불빛 모두 꺼진 뒤에도 音階에 감전된 수형자처럼 그는 우두커니 한자리에 날이 새도록 앉아 있다
노향림 시인 / 엉또폭포
엉또폭포를 보신 적 있나요? 제주 서귀포시 올레길 7-1코스 엉뚱한, 폭포라는데요. 제주 사투리 엉과 도의 합성어 엉또는 참으로 엉뚱하게도 숨고 싶으면 작은 바위틈이나 굴속에 숨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몸 야위며 있다가 내려가고 싶으면 불쑥 뛰쳐나가 언제든 뛰어 내린다는군요. 자신을 스스로 적막 속에 가둔 자유인이지요. 하지만 누구도 그 속을 헤아릴 수 없어요. 햇볕 쨍쨍한 날이 계속되면 제 속이 불 속의 명부전처럼 활활 타올라 부글부글 끓고 있다가 간밤 몰래 폭우 몇 줄기 기운차게 내리면 폭포가 되어 내 여기 나와 있어요, 천지를 뒤흔드는 폭포소리를 사람들은 갑작스레 듣게 되지요. 콸콸콸콸 쏴아쏴아 콸콸콸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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