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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노향림 시인 / 마루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31.

노향림 시인 / 마루

 

 

마른 걸레로 거실을 닦으며

얇게 묻은 권태와 시간을

박박 문질러 닦으며

미국산 수입 자작나무를 깐

세 평의 근심 걱정을 닦으며

지구 저쪽의 한밤중 누워 잠든

조카딸의 잠도 소리 없이 닦아 준다.

다 해진 내 영혼의 뒤켠을

소리 없이 닦아 주는 이는

누구일까.

그런 걸레 하나쯤

갖고 있는 이는 누구일까.

 

 


 

 

노향림 시인 / 새들은 길을 트며 날아간다

 

 

기르던 한 쌍의 새가 날아간 빈 새장엔

피 배인 햇살이 툭툭 떨어져 나뒹글고

뾰족한 부리로 낟알만큼씩 쪼아댄 시간들이

모이통과 함께 한구석에 넘어져 있다

까마득히 날아간 새들이 숨쉬었던 흔적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허공을 뚫고

누구도 넘보지 않을 더 먼 곳

바람만 재빨리 누웠다 일어서는 곳

모든 새들은 온몸으로 길을 트며 날아간다

좁쌀만 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지상은

언제나 원근법의 깊은 아름다움이 파인

3D SF 화면처럼 반짝인다

어느 곳은 연둣빛

어느 곳은 바다 빛

어는 곳은 눈물 빛

 

 


 

 

노향림 시인 / 어느 거장의 죽음

 

 

낡은 마하 피아노가 전 재산이다

키가 유난히 작고 등이 굽은 피아니스트

그는 오래전부터 수전증을 앓고 있다.

연주 때마다 활짝 열리는 피아노 뚜껑

그 밑 낭떠러지 같은 외길이 드러나고

가는 막대 하나가 파르르 떨린다.

어디선가 가는 발목의 새들이 무더기로 날아들고

연미복 입은 그의 죽지 속에 편안히 안긴다.

새의 부리는 길고 날카롭다.

건반 위에서 무시로 떨리는 손

쾅쾅 마하 광속으로 튀는 빛으로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을 연주할 땐

어느덧 새들은 허공으로 날아가고 없다.

불빛 모두 꺼진 뒤에도 音階에 감전된

수형자처럼 그는 우두커니

한자리에 날이 새도록 앉아 있다

 

 


 

 

노향림 시인 / 엉또폭포

 

 

엉또폭포를 보신 적 있나요?

제주 서귀포시 올레길 7-1코스

엉뚱한, 폭포라는데요.

제주 사투리 엉과 도의 합성어 엉또는

참으로 엉뚱하게도 숨고 싶으면

작은 바위틈이나 굴속에 숨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몸 야위며 있다가

내려가고 싶으면 불쑥 뛰쳐나가

언제든 뛰어 내린다는군요.

자신을 스스로 적막 속에 가둔 자유인이지요.

하지만 누구도 그 속을 헤아릴 수 없어요.

햇볕 쨍쨍한 날이 계속되면

제 속이 불 속의 명부전처럼 활활 타올라

부글부글 끓고 있다가

간밤 몰래 폭우 몇 줄기 기운차게 내리면

폭포가 되어 내 여기 나와 있어요,

천지를 뒤흔드는 폭포소리를

사람들은 갑작스레 듣게 되지요.

콸콸콸콸 쏴아쏴아 콸콸콸콸

 

 


 

노향림 시인

194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생. 1965년 중앙대 영문과 졸업. 1970년 《월간문학》 시 부문 신인상에 〈불〉 등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K읍 기행』(1977), 『눈이 오지 않는 나라』(1987),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1992),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1998)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2005)  등이 있음.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이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