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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종인 시인 / 죽은 나무들이 말하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31.

유종인 시인 / 죽은 나무들이 말하길

 

 

  죽은 나무들이 말하길

  잎은 다시 돋지 않아도

  꽃은 다시 피지 않아도

  허공이 졸아들듯

  공중(空中)이 메워지는 것은 아니다

 

  죽은 나무들이 이르길

  죽은 뒤에도 서 있는 것은

  죽어도 길들여지지 않은 고집이 있다는 걸

  삭정이를 떨어뜨리며 마지막까지

  기다리는 자세는 죽음이 간섭할 수 없음이다

 

  죽은 나무들이 보여주길

  죽은 뒤에도 여전히 죽는 연습이 남았다는 걸

  껍질을 떨구고 벌레들에게 사방으로 먹히고

  그러고도 남는 몸이란

  보굿을 떨어뜨리며 나뭇가지들 곡선을 풀 때까지

  곤줄박이 동고비 진박새의 횃대로 서보는 것이다

 

  죽은 나무들이 바라길

  죽어서도 무덤을 짓지 않는 건 그래도

  나머지로 더 쓰일 데가 없나

  노출을 즐기지 않을 수 없음이며,

  죽어서도 더 깊이 한 번 더 죽을 순간이 남지 않았나

  끝까지 이용당하고 버려지길 바라는 바이다

 

  죽은 나무들이 말하길

  죽은 나무들은 꽃과 잎들과 열매의 수사(修辭)를 챙기지 않는 문  장의 여행이며

  죽은 나무들이 먼 여행에서 돌아온 날

  꼭 죽은 나무라고만 부를 수 있나

  죽음을 달게 마신 몸으로 키워낸 층층의 나무 버섯을 후계자처럼 내미는 것이다

 

웹진 『시인광장』 2012년 2월호 발표

 

 


 

유종인 시인

1968년 인천에서 출생. 시립인천전문대학 문헌정보학과  졸업. 1996년 《문예중앙》에 시 〈화문석〉 외 9편이 당선되어 등단. 200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과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 시집으로 『아껴 먹는 슬픔』과 『교우록』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