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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노향림 시인 / 여름이 가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

노향림 시인 / 여름이 가다

 

 

만날 사람도 없이 긴 나무의자에

누워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불쾌하다.

 

닫힌 얼음집 앞에 빚더미처럼

여름이 엎질러져 있다.

 

문안에서 누가 톱질을 하는지

새벽에서 밤까지

슬픔들이 토막으로 잘려 나오는 소리.

질이 연한 내 마음이 아프다.

 

쭈쭈바를 입에 문 아이가

기웃거리다 지나가는 쪽

속이 편안한지, 덜컹거리며 가야 할 길 버리고

시동 걸린 화물트럭이 빈 채로 대기중이다.

 

큰길 옆 버즘나무 그늘 밑

사람들이 얼굴을 펴면 뜨내기 꽃들의 얼굴에도

햇볕이 환하게 빛났다.

 

몰래 내다 버린 화분 속에

관절을 앓는 남천이, 은침을 박고 있는

어깨와

겨드랑이에

여름이 환하게 지는 중이다.

 

 


 

 

노향림 시인 / 위로

 

 

내릴 손님이 없어 폐쇄 된

시골 간이역에서

낭자하게 피 흘리는 선홍빛 셀비어 꽃

문득 철길을 따라 걷는 가을이

맨손으로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지며

선연한 피들을

닦아주고 차마 돌아서지 못한다

 

 


 

 

노향림 시인 / 정동진역

 

 

역사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다 낡은 환상만 내다놓은 나무 의자들

공허가 주인공처럼 앉아 있다.

그 발치엔 먼 데서 온 파도의 시린 발자국들

햇살 아래 쏟아낸 낱말들이

실연처럼 쌓이고

우우우 모래바람 우는 소리,

먼저 도착한 누군가 휩쓸고 갔나 보다.

바닷새들이 그들만의 기호로

모래알마다에 발자국들 암호처럼 숨겨놓고 난다.

낯선 기호의 문장들이 일파만파 책장처럼

파도 소리로 펄럭이면

일몰이 연신 그 기호를 시뻘겋게 염색한다.

 

 


 

 

노향림 시인 / 제라늄

 

 

어여쁜 이름 제라늄

제철이 지나 잎 다 떨군 마른 가지 끝에 매달려

붉은 혀를 빼물고 간신히 피어 있네요.

생이란 매달려 피어 있는 것이라고

천 길 낭떠러지에서도 피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철 지난 가지 끝의

생각들에게 말을 걸어요.

창틀 없는 창가로 주춤주춤 무릎걸음으로

다가앉아 막막하게 뜬 하늘 오래 바라보아요.

저 광대무변한 이천 몇억 개의 별자리를

하나하나 세고 있나요?

환하게 피었다 지는 저 별빛에도

속삭이는 몸짓과 뜨건 피가 함께 흐른다고

마음에 불을 지피는 제라늄

그 주위를 맴돌면서 작디작은 얼룩이

그대의 흐린 눈빛에 어른거려요.

가지 끝에서 툭 꽃잎 떨어지는 소리 환해요.

등 돌려 누운 어둠들이 이 지상을 뒹굴며

가만가만 혀로 핥는 소리

제라늄 제라늄

 

 


 

노향림 시인

194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생. 1965년 중앙대 영문과 졸업. 1970년 《월간문학》 시 부문 신인상에 〈불〉 등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K읍 기행』(1977), 『눈이 오지 않는 나라』(1987),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1992),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1998)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2005)  등이 있음.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이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