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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구재기 시인 / 5월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

구재기 시인 / 5월

 

 

1

산빛은

저물녘에 이우르고

산기슭

외딴 초가

연기는

줄줄이 피어오르는데

노승(老僧) 한 분

산사(山寺)를 뒤로하여

바람 끝에

하롱하롱

오동꽃

송이송이

 

2

빗방울에 씻기고 씻기어

마침내 튕겨져 나온

햇살 무리들아

허리를 구부리고

무슨 금맥(金脈)이라도 찾으려는가

하늘 끝 어디쯤서

뺨 부비고 눈부시게 살이 올라

저기, 저,

젖가슴 철철 넘치는 청보리빛

눈물 찬 꽃봉오리야

 

 


 

 

구재기 시인 / 가끔은 흔들리며 살고 싶다

 

 

지난밤의 긴 어둠

비바람 심히 몰아치면서, 나무는

제 몸을 마구 흔들며 높이 소리하더니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더 푸르다

감당하지 못할 이파리들을 털어 버린 까닭이다

맑은 날 과분한 이파리를 매달고는

참회는 어둠 속에서 가능한 것

분에 넘치는 이파리를 떨어뜨렸다

제 몸의 무게만큼 감당하기 위해서

가끔은 저렇게 남모르게 흔들어 대는 나무

나도 가끔은 흔들리며 살고 싶다

어둠을 틈 타 참회의 눈을 하고

부끄러움처럼 비어있는 천정(天頂)을 바라보며

내게 주어진 무게만을 감당하고 싶다

홀가분하게 아침 햇살에 눈부시고 싶다

대둔산 구름다리를 건너며

흔들리며 웃는 게 눈부실 수 있다

가끔씩 온몸을 흔들리며

무게로 채워진 바위

그 무게를 버려가며 사는 게 삶이다

지난날들의 모자가 아직 씌워져 남아있는

푸념의 확인, 구름다리 밑의 아찔한 거리로

가끔은 징검징검 흔들리며 살고 싶다

 

 


 

 

구재기 시인 / 가을 하늘

 

 

울타리 밑에서 호박은 핑크빛으로 늙어갔다

마른 넝쿨손이 울타리목을 잡은 게 필사적이었다

은행잎이 노라니 익어가는 언덕길 끝은

푸르디 높은 하늘

어디서, 쩡쩌엉쩡, 대낮의 장끼가 울어댔다

하루가 소리 없이 빨리도 지나가지만

다가오는 먼 그림 속 빛깔들이

바람 속에서 다투어가고 있었다

 

 


 

 

구재기 시인 / 그림자

 

 

세상의

맑은 곳일수록

햇살 밝은 날일수록

 

내 삶의

무게만큼

내려놓고 싶다

 

 


 

 

구재기 시인 / 금강(金剛)으로 향하며

 

 

금강으로 향하여

바다를 달린다

하얗게 일어서는 뱃길

 

발을 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자는 오라

흙탕물을 밟지 않은

전투화를 벗어 던지고

달릴 수 있는 자는

모두 이곳으로 오라, 오라

 

금강으로 가는 길

하늘의 모든 구름이 쏟아 부은

온갖 설움과 슬픔과 원망을 딛고

너와 나는 비로소

한 마음 한 몸이 될지니

 

두터운 옷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달릴 수 있는 자는

모두 이 뱃길로 오라

이 푸른 알몸의 바다로 오라

 

청정의 창해

햇살이란 햇살들이

이곳에서는 애시당초

심해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것

 

푸른 물낯을 터전으로 하고

금강의 그림자를 얼싸안을 수 있는

너른 가슴인 자는

이 뱃길에 온몸으로 뛰어 들어라

 

금강으로 향하여

뱃길을 간다

청정의 순한 길

모진 두 손을 씻으며 닦으며

금강과 한 몸 되려

하얗게 일어서는 창해의 햇살로

뱃길을 빚으며 간다

 

 


 

 

 구재기(丘在期) 시인

호. 신곡(新谷). 1950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 충남대학 교육대학원 졸업.  1978년 《현대시학》에서 시부문 추천 완료(전봉건 시인 추천)로 등단. 고등학교 국어교사. 시집으로 『농업시편』, 『바람꽃』, 『아직도 머언 사람아』, 『삼 십리 둑길』, 『둑길行』, 『 빈손으로 부는 바람』, 『들녘에 부는 바람』, 『정말로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내 가슴 속의 날 지우는 일이다』, 『겨울은 옷을 벗지 않는다』, 『콩밭 빈 자리』, 『千房山체 오르다가』, 『살아갈 이유에 대하여』, 『강물』 등이 있고  제 2회 충남문학상, 충청남도 문화상 문학부문, 제6회 시예술상 수상. 현재 충남시인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