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구재기 시인 / 잡초 뽑기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4.

구재기 시인 / 잡초 뽑기

 

 

별나게 울어대는 까치 한 마리를 보고

이른 아침 골아실 돌밭에 앉아

잡초를 뽑아내는 것일까, 아버지는

허이연 뿌리째 뽑혀지는 잡초를 볼 때마다

훌훌 옷의 먼지라도 털어내듯

땅을 마다하고

모조리 도시로 떠나버린

자식들의 생각을 되살려낸다

어느 잡초더미에서 작물로 자라

연약한 목을 내밀고 있을까

때로는 손끝이 바르르 떨리기도 하지만

하나의 잡초가 뽑힐 때마다

그만큼 넓어지는 視野

돌밭 둔덕에 학처럼 앉아

마지막 힘을 더하여 날개를 퍼득이며

세상의 구석구석 모든 잡초를 뽑아낸다, 아버지는

 

 


 

 

구재기 시인 / 저수지에서

 

 

물결이 흔들리자

모든 게 사라지는가 싶더니

모든 게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물결이 조용해지면서부터였다

 

조용해진다는 것은

제 몸을 스스로 낮춘다는 것

저수지는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고

맑은 물밑까지

훤히 보이는가 싶다가

 

항상 높이 존재할 수 있는 하늘이

조용한 물 속에

몸을 내릴 줄 안다는 것을

머리 숙여 하늘을 우러르며

처음 알았다

 

 


 

 

구재기 시인 / 좋은 일

 

 

슬픔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기다릴 수 있는 슬픔을 가진다는 것은

더욱 좋은 일입니다

막차는 이미 떠나고

차마 돌려지지 않는

발걸음을 무겁게 돌리면서

눈물 한 종재기라도 흘릴 수 있는

사랑을 가졌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오늘의 날은 이미 깊이 저물어

또 다시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곳에

내일이 있다는 것은

조금은 더디게 만날 사랑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좋은 일입니다

 

 


 

 

구재기 시인 / 햇빛 사냥

 

 

사과나무에서 사과알로 미처 다 익지 않은 것은

햇빛 사냥을 시작한다

 

멍석 위에 동그마니 앉아

하늘을 닮아 가는 연습을 하다가

 

바람 한 줄기를 만나면

바람에 실린 햇빛까지도 사냥한다

 

청청청청 가을 하늘이 살아서

죄 없는 지상의 자리

 

넉넉한 햇빛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로

붉은 기억의 흔적으로 남기기 위하여

미처 다 익지 않은 사과 알들은

멍석에 동그마니 앉아

햇빛 사냥을 한다

 

 


 

 

구재기 시인 / 흔들의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으면

세상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이

이토록 편안할 줄이야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 그 물결이

출렁이면서 바다가 살아있다는 것이

보인다 도무지 마음이 가지 않은 것들도

한 번쯤 흔들리고 나면 정이 붙는다

흔들릴 때마다 하늘이 내려와 앉고

멀리 보이는 작은 섬들이 치솟다가

물 속에 잠기기도 한다 한여름

무더위가 씻은 듯이 사라질 무렵

흔들리며 살아간다는 것이 안심이 된다

 

배 한 척이 수평선 위에 뜨기까지

얼마동안이나 육지를 밀어내며

흔들려 나아갔을까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는

세상에서 혼자서만 편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나를 본다

 

 


 

 

 구재기(丘在期) 시인

호. 신곡(新谷). 1950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 충남대학 교육대학원 졸업.  1978년 《현대시학》에서 시부문 추천 완료(전봉건 시인 추천)로 등단. 고등학교 국어교사. 시집으로 『농업시편』, 『바람꽃』, 『아직도 머언 사람아』, 『삼 십리 둑길』, 『둑길行』, 『 빈손으로 부는 바람』, 『들녘에 부는 바람』, 『정말로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내 가슴 속의 날 지우는 일이다』, 『겨울은 옷을 벗지 않는다』, 『콩밭 빈 자리』, 『千房山체 오르다가』, 『살아갈 이유에 대하여』, 『강물』 등이 있고  제 2회 충남문학상, 충청남도 문화상 문학부문, 제6회 시예술상 수상. 현재 충남시인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