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태주 시인 / 내장산 단풍
내일이면 헤어질 사람과 와서 보시오,
내일이면 잊혀질 사람과 함께 보시오,
왼 산이 통째로 살아서 가쁜 숨 몰아 쉬는 모습을.
다 못 타는 이 여자의 슬픔을 …….
나태주 시인 / 누님의 가을
바야흐로 이 나라에는 누님의 가을입니다. 뻐꾸기 뻐꾸기 꾀꼬리 찌르레기 같은 것들 모두 목이 쉬어 재 넘어가고 먹구름도 따라가고 이제 이 나라에는 바위 틈서리로 섬돌 밑으로 날카롭고 미세한 강물 다시 흐르기 시작하여 눈물어린 안구를 말갛게 씻고 바라보아야 할 누님의 가을입니다
누님. 그 아득한 미리내를 건너 깊은 밤마다 꽃상여 타고 하늘 나라로 시집 가신 누님. 들국화 꺾어 싸리꽃 꺾어 꽃다발 만들어 드릴 테니 무덤을 열고 꽃가마 타고 서리기러기 줄 서 날으는 하늘로 해서 치마 끝에 초록 수실 빨강 수실 넘실거리며 두 눈고피에 파란 불 켜 달고 오십시요. 부디 이 땅에 다시 강림하십시오.
이제 이 땅의 모든 꽃들과 열매와 나무들은 일 년치의 죽음을 장식하기 위하여 예쁘게 예쁘게 치마 저고리를 갈아 입었고 이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죽어서도 이름이 잊혀지지 않기를 꿈꾸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님. 어찌하여 풀벌레 울음 소리는 밤새워 아직도 우리에게 돌아오라, 돌아오라, 돌아오라, 목청을 돋구어 이 땅의 적막을 보태는 것이겠습니까? 어찌하여 여윈 풀잎은 작은 이슬방울 하나에도 힘겨워 고개를 떨궈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누님. 바야흐로 이 나라에는 누님의 가을입니다. 그 아득하고 깜깜한 눈물의 무덤을 열고 저 미세한 풀벌레 울음소리의 강물을 노 저어 아무도 모르게 가만가만 이 땅의 풀과 나무들 속으로 오십시요. 오셔서 붉은 나뭇잎들을 더욱 불게 물들이고 익어 가는 온갖 과일들을 더욱 달디달게 익히시어 이 나라의 가을을 더욱 완전무결한 죽음이게 하십시요. 이 나라의 가을을 완성하게 하십시오.
나태주 시인 / 다락방
이담에 집을 마련한다면 지붕 위에 다락방 하나 달린 집을 마련하겠습니다. 문틈으로 하늘 구름도 잘 보이고 바람의 옷소매도 잘 보일 뿐더러 밤이면 별이 하나 둘 돋아나는 것도 곧잘 볼 수 있는 그러한 다락방을 하나 마련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속상하거나 답답한 날은 다락방에 꽁꽁 숨으렵니다. 그대도 짐작 못하고 하느님도 찾지 못하시도록.
나태주 시인 / 다시 9월
기다리라 오래 오래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지루하지만 더욱
이제 치유의 계절이 찾아온다 상처받은 짐승들도 제 혀로 상처를 핥아 아픔을 잊게 되리라
가을 과일들은 봉지 안에서 살이 오르고 눈이 밝고 다리 굵은 아이들은 멀리까지 갔다가 서둘러 돌아오리라
구름 높이 높이 떴다 하늘 한 가슴에 새하얀 궁전이 솟아올랐다
이제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게 되는 시간 기다리라 더욱 오래 오래 그리고 많이.
나태주 시인 / 다시 산에 와서
세상에 그 흔한 눈물 세상에 그 많은 이별들을 내 모두 졸업하게 되는 날 산으로 다시 와 정정한 소나무 아래 터를 잡고 둥그런 무덤으로 누워 억새풀이나 기르며 솔바람 소리나 들으며 앉아 있으리.
멧새며 소쩍새 같은 것들이 와서 울어주는 곳, 그들의 애인들꺼정 데불고 와서 지저귀는 햇볕이 천년을 느을 고르게 비추는 곳쯤에 와서 밤마다 내리는 이슬과 서리를 마다하지 않으리. 길길이 쌓이는 壯雪을 또한 탓하지 않으리.
내 이승에서 빚진 마음들을 모두 갚게 되는 날, 너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백발로 졸업하게 되는 날 갈꽃 핀 등성이 너머 네가 웃으며 내게 온다 해도 하낫도 마음 설레일 것 없고 하낫도 네게 들려줄 얘기 이제 내게 없으니 너를 안다고도 또 모른다고도 숫제 말하지 않으리.
그 세상에 흔한 이별이며 눈물, 그리고 밤마다 오는 불면들을 내 모두 졸업하게 되는 날, 산에 다시 와서 싱그런 나무들 옆에 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하늘의 천둥이며 번개들을 이웃하여 떼강물로 울음 우는 벌레들의 밤을 싫다하지 않으리. 푸르디푸른 솔바람 소리나 외우고 있으리.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도언 시인 / 당신이라는 고독 (0) | 2020.08.04 |
|---|---|
| 김용택 시인 / 내가 불입니다 외 4편 (0) | 2020.08.04 |
| 구재기 시인 / 잡초 뽑기 외 4편 (0) | 2020.08.04 |
| 이선균 시인 / 허공의 씨눈처럼 (0) | 2020.08.03 |
| 이여원 시인 / 탱자나무 담장 (0) | 2020.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