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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 / 몸
아침저녁 맑은 물로 깨끗하게 닦아 주고 매만져 준다 당분간은 내가 신세지며 살아야 할 사글세방 밤이면 침대에 반듯이 눕혀 재워도 주고 낮이면 그럴 듯한 옷으로 치장해 주기도 하고 더러는 병원이나 술집에도 데리고 다닌다 처음에는 내 집인 줄 알았지 살다보니 그만 전셋집으로 바뀌더니 전세 돈이 자꾸만 오르는 거야 견디다 못해 전세 돈 빼어 이제는 사글세로 사는 신세가 되었지 모아둔 돈은 줄어들고 방세는 점점 오르고 그러나 어쩌겠나 당분간은 내가 신세져야 할 나의 집 아침저녁 맑은 물로 깨끗하게 씻어 주고 닦아준다
나태주 시인 / 무인도
바다에 가서 며칠 섬을 보고 왔더니 아내가 섬이 되어 있었다 섬 가운데서도 무인도가 되어 있었다
나태주 시인 /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붑니다 창문이 덜컹댑니다 어느 먼 땅에서 누군가 또 나를 생각하나 봅니다 바람이 붑니다 낙엽이 굴러갑니다 어느 먼 별에서 누군가 또 나를 슬퍼하나 봅니다 춥다는 것은 내가 아직도 숨쉬고 있다는 증거 외롭다는 것은 앞으로도 내가 혼자가 아닐거라는 약속 바람이 붑니다 창문에 불이 켜집니다 어느 먼 하늘 밖에서 누군가 한 사람 나를 위해 기도를 챙기고 있나 봅니다.
나태주 시인 / 부탁
너무 멀리까지는 가지 말아라. 사랑아
모습 보이는 곳 까지만 목소리 들리는 곳 까지만 가거라.
돌아올 길 잊을까 걱정이다. 사랑아
나태주 시인 / 붓꽃
슬픔의 길은 명주실 가닥처럼이나 가늘고 길다
때로 산을 넘고 강을 따라가지만
슬픔의 손은 유리잔처럼이나 차고도 맑다
자주 풀숲에서 서성이고 강물 속으로 몸을 풀지만
슬픔에 손목 잡혀 멀리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온 그대
오늘은 문득 하늘 쪽빛 입술 붓꽃 되어 떨고 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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