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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태주 시인 / 몸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6.

나태주 시인 / 몸

 

 

아침저녁 맑은 물로

깨끗하게 닦아 주고

매만져 준다

당분간은 내가 신세지며

살아야 할 사글세방

밤이면 침대에 반듯이 눕혀

재워도 주고

낮이면 그럴 듯한 옷으로

치장해 주기도 하고

더러는 병원이나 술집에도

데리고 다닌다

처음에는 내 집인 줄 알았지

살다보니 그만 전셋집으로 바뀌더니

전세 돈이 자꾸만 오르는 거야

견디다 못해 전세 돈 빼어

이제는 사글세로 사는 신세가 되었지

모아둔 돈은 줄어들고

방세는 점점 오르고

그러나 어쩌겠나

당분간은 내가 신세져야 할

나의 집

아침저녁 맑은 물로 깨끗하게

씻어 주고 닦아준다

 

 


 

 

나태주 시인 / 무인도

 

 

바다에 가서 며칠

섬을 보고 왔더니

아내가 섬이 되어 있었다

섬 가운데서도

무인도가 되어 있었다

 

 


 

 

나태주 시인 /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붑니다

창문이 덜컹댑니다

어느 먼 땅에서 누군가 또

나를 생각하나 봅니다

바람이 붑니다

낙엽이 굴러갑니다

어느 먼 별에서 누군가 또

나를 슬퍼하나 봅니다

춥다는 것은 내가 아직도

숨쉬고 있다는 증거

외롭다는 것은 앞으로도 내가

혼자가 아닐거라는 약속

바람이 붑니다

창문에 불이 켜집니다

어느 먼 하늘 밖에서 누군가 한 사람

나를 위해 기도를 챙기고 있나 봅니다.

 

 


 

 

나태주 시인 / 부탁

 

 

너무 멀리까지는

가지 말아라.

사랑아

 

모습 보이는 곳

까지만

목소리 들리는 곳

까지만 가거라.

 

돌아올 길

잊을까 걱정이다.

사랑아

 

 


 

 

나태주 시인 / 붓꽃

 

 

슬픔의 길은

명주실 가닥처럼이나

가늘고 길다

 

때로 산을 넘고

강을 따라가지만

 

슬픔의 손은

유리잔처럼이나

차고도 맑다

 

자주 풀숲에서 서성이고

강물 속으로 몸을 풀지만

 

슬픔에 손목 잡혀 멀리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온 그대

 

오늘은 문득 하늘

쪽빛 입술 붓꽃 되어

떨고 있음을 본다.

 

 


 

나태주(羅泰柱) 시인

1945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 1963년 공주사범학교 졸업.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대숲 아래서』를 비롯, 『누님의 가을』, 『막동리 소묘』, 『사랑이여 조그만 사랑이여』, 『풀잎 속 작은 길』, 『슬픔에 손목 잡혀』, 『산촌 엽서』, 『쪼끔은 보랏빛으로 물들 때』 등과 산문집 『외할머니랑 소쩍새랑』, 『시골사람 시골선생님』, 동화집 『외톨이』 등이 있음. 흙의문학상, 충청남도문화상, 현대불교문화상, 박용래문학상,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황조근조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