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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용택 시인 / 봄이 그냥 지나요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6.

김용택 시인 / 봄이 그냥 지나요

 

 

올 봄에도

당신 마음 여기 와 있어요

여기 이렇게 내 다니는 길가에 꽃들 피어나니

내 마음도 지금쯤

당신 발길 닿고 눈길 가는 데 꽃 피어날 거예요

생각해 보면 마음이 서로 곁에 가 있으니

서로 외롭지 않을 것 같아도

우린 서로

꽃보면 쓸쓸하고

달보면 외롭고

저 산 저 새 울면

밤새워 뒤척여져요

마음이 가게 되면 몸이 가게 되고

마음이 안 가더래도

몸이 가게 되면 마음도 따라가는데

마음만 서로에게 가서

꽃 피어나 그대인 듯 꽃 본다지만

나오는 한숨은 어쩔 수 없어요

당신도 꽃산 하나 갖고 있고

나도 꽃산 하나 갖고 있지만

그 꽃산 철조망 두른 채

꽃 피었다가

꽃잎만 떨어져 짓밟히며

새 봄이 그냥 가고 있어요.

 

 


 

 

김용택 시인 / 빗장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해

언제 열렸는지

시립기만 합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논둑 길을 마구 달려보지만

내 달아도 내달아도

속 떨림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시도 때도 없이

곳곳에서 떠올라

비켜주지 않는 당신 얼굴 때문에

어쩔 줄 모르겠어요

무얼 잡은 손이 마구 떨리고

시방 당신 생각으로

먼 산이 다가오며 어지럽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당신을 향해 열린

마음을 닫아보려고

찬바람 속으로 나가지만

빗장 걸지 못하고

시린 바람만 가득 안고

돌아옵니다.

 

 


 

 

김용택 시인 / 사람들은 왜 모를까

 

 

이별은 손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 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김용택 시인 / 세상의 비밀들을 알았어요

 

 

닫힌 내마음의 돌문을열며

꽃바람 해바람으로 오신 당신

당신으로 하여

별이 왜 반짝이는지

꽃이 왜 꽃으로 피어나는지

세상에 가득한 그런 가만가만한

비밀들을 알게 되었어요

 

아, 내 가는 길목마다

훤하게 깔린 당신

돌부리 끝에 걸려 넘어져도

거기 언뜻 발끝이 아프게 부서지는 당신

이 초겨울 빗줄기 속에서도

들국 같은 당신의 얼굴이

하얗게, 하얗게 줄지어 달려옵니다

 

이 길에 천둥 번개 칠까 두려워요

 

 


 

 

김용택 시인 / 슬픔

 

 

외딴 곳

집이 없었다

짧은 겨울날이

침침했다

어디 울 곳이

없었다

 

 


 

 

김용택 시인 / 약이 없는 병

 

 

그리움이, 사랑이 찬란하다면

나는 지금 그 빛나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아파서 못 견디는 그 병은

약이 없는 병이어서

병중에 제일 몹쓸 병이더이다

 

그 병으로 내 길에

해가 떴다가 지고

달과 별이 떴다가 지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수없이 돌아흐르며

내 병은 깊어졌습니다

 

아무리 그 병이 깊어져도

그대에게 이르지 못할 병이라면

이제 나는 차라리 그 병으로

내가 죽어져서

 

아, 물처럼 바람처럼

그대 곁에 흐르고 싶어요

 

 


 

 

김용택 시인 / 집

 

 

외딴집,

외딴집이라고

왼손으로 쓰고

바른손으로 고쳤다

 

뒤뚱거리며 가는가는 어깨를 가뒀다

 

불 하나 끄고

불 하나 달았다

 

가물가물 눈이 내렸다

 

 


 

김용택(金龍澤, 1948 ~ ) 시인.

전북 임실 출생. 순창농림고등학교를 졸업. 1982년 “21인 신작 시집”에 ‘섬진강’을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섬세한 시어와 서정적인 가락을 바탕으로 농촌의 현실을 노래하였다. 섬진강 곁에 거처를 두고 초등 학교 교사로 재직중인 그는 이제까지 시집 『섬진강』(1985) · 『맑은 날』(1986) · 『누이야 날이 저문다』(1988) · 『꽃산 가는 길』(1988) · 『그리운 꽃편지』(1989) · 『그대, 거침없는 사랑』(1993) · 『강 같은 세월』(1995) · 『그 여자네 집』(1998) 등을 펴낸 바 있다. 김용택은 1986년에 ‘김수영 문학상’, 1997년에 ‘소월 시문학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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