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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민경환 시인 / 해를 빗대어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6.

민경환 시인 / 해를 빗대어

 

 

  초록이 무섭다 저 그악스러움이라니

  느림은 사나운 것이로구나

  식물류의 눈은 없는 것이거나 온몸이거나 여야 맞다

  저들의 굴광성은 거역할 수 없는 빛의 욕동이다

  이유 없이 치닫는 에네르기, 소리 없이 저지르는 불륜이다

  누군가가 당신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바로 그런 몸짓이다

 

  움직이는 것들은

  붙박인 것들에 비해 저급하다는

  말, 말을 하고 싶은 것인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눈을 지닌 저,

  식물성의 저, 무조건의 생장점인 저,

  낮은 주파수의 바지런함은

  어디든 싸다닐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무색케 한다

  ……허탈한 일이다

 

  수태가 시작되면 가장 크고 실하게

  눈부터 키우는 동물류의 의지란

  결국 빛을 위한 최상의 배려일 텐데 왜,

  머리 위의 저 해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는 것인가

 

  당신은 왜 나를 또 그렇게 보는가

  괜스레 보기를 원하는가 보는 건 보는데

  또 왜 눈을 들어 마주보라며 자꾸 그렇게 꽃을 피워대시나

  밝은 데서 서로를 바라본 시간만큼이나

  이제는 어둠에도 꽤 익숙해졌을 테지

 

  그렇지?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렇게 온 세상의 눈부심에 익숙해 졌을 때라든가

  밝음이 만드는 이면에 대해 겨우 조금 생각해 볼 때마다

  다족류의 해명 안 되는 저 진귀한 각막들과 저,

  수수많은 비늘에서 번져나는 저,

  光氣의 페르몬으로 나는 그저 아연해질 뿐이라네

 

웹진『시인광장』 2012년 5월호 발표

 

 


 

민경환 시인

1957년 강원도 영월에서 출생. 2003년  《애지》 로 등단. 시집으로 『탈주냐 도주냐』(종려나무, 2009)가 있음. 2008년 제6회 '애지문학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