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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문자 시인 / 고백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6.

최문자 시인 / 고백

 

 

향나무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제 몸을 찍어 넘기는 도낏날에

향을 흠뻑 묻혀주는 향나무처럼

그렇게 막무가내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최문자 시인 / 그 날의 꽃구경

 

 

그 날,

벚꽃이 만개했다는 그곳으로

우리들은 꽃구경을 갔다.

갖가지 통증을 감추고

꽃을 찾아 나선 사람들은

꽃 아래 가득 차 밀려다녔다.

꽃들은 감춘 통증을 알아보고

매워서 연신 재채기를 해댔다.

봄 끝에 매달렸던 돌풍이 일자,

꽃의 살점들은 떨어져 나갔다.

눈발처럼 서쪽을 향해 허옇게 날아갔다.

꽃나무는 동쪽에 그냥 남아 있었다.

따라가 볼 수 없는 꽃의 살점

반쯤 남은

꽃 아래서

사람들은 서로 살점 뜯긴 얘기를 나눴다.

푸드득

푸드득

 

 


 

 

최문자 시인 / 꽃잎

 

 

유럽 여행 중

이름 모를 이국의 해변에서

온몸에 머드팩을 한 적이 있다.

몸에다 진흙을 바르고 진흙 속에 누웠었다.

분명,

여자의 몸에는 깊은 꽃잎이 있는 듯 했다.

흙냄새 풍기는 꽃잎이 있는 듯했다

진흙은 꽃잎을 덮고도 꽃잎 위에서 넘실거렸다.

비누보다 몸에 익숙한 꽃잎

몸의 정맥에 대고 속삭이는 꽃잎

자신만의 풍경을 가지고 있는 꽃잎

이브가 수치를 가릴 때

흔들리던 부표, 그 떨리던 꽃잎

자장가처럼 간지럽게 흘러내리는 꽃잎

태초에 신이 진흙을 주물럭거릴 때

진흙을 뚫고 여자로 움트던 꽃잎

진흙 위에 진흙을 바르며 꽃잎을 느꼈었다.

가장자리가 다 닳아빠지도록

그 동안 얼마나 창백하게 내버려둔 꽃잎인가?

삶의 들판 사이사이에서 울고 웃던 꽃잎

울다가 구름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던 꽃잎

진흙인 줄 모르고 쇠처럼 써버리던 꽃잎

진흙 속에 누워 유년의 꽃잎을 기억했다.

파들거리며 부끄럼 타던 발그레한 속꽃잎

그 발기한 분홍색 꽃잎을.

 

 


 

 

최문자 시인 / 나라고 할 것인가

 

 

아주 천천히 손을 씻는다

 

크고 따뜻했던 손이

때때로 검정 색이야

피를 흘리고 가끔 붕대를 감고

 

봄밤 연인의 손을 잡다가 너무 많이 울어본 손이

여러 개로 손을 쪼개고 어느 한 조각에 잠긴다

 

대낮에는 내 손이 아니다

나를 떠난다

나를 이긴다

풋과일처럼 새파랗고 단호하게 다른 손을 잡는다

눈을 감고 있으면 뻐근했다

하루가 꿈틀거렸다

뭔가를 할퀴고 만지다가 깊은 밤에야 돌아왔다

잔을 돌리며 우리는 아무도 그것을 묻지 않았다

 

한꺼번에 몇 개의 손이 되려 하는 손에게

왜 피가 나느냐고 묻지 않았다

아아, 하얗게 자고 싶어

얼굴 같은 손이 나에게 말했다

 

 


 

 

최문자 시인 / 노랑나비

 

 

사랑은

내게 마지막 남은 들판이다.

아직도 노랑나비 비릿한 속삭임으로 꽉 차 있다.

들판에 서면

물결 같기도 하고

눈물 같기도 한 노랑나비가

들풀의 정강이에서 글썽이고 있던 들판이다.

울지도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날아가던 노랑나비 들판.

 

사랑의 문장을 노랗게 새긴 꽃잎을 들판에 놓았었다.

홀라당홀라당 허물을 벗어놓고

문장을 건너뛰던 노랑나비

메두기 다리로 뛰어가던 노랑나비 들판

 

내가 쓴 시에서

노랑나비는 십 년 이상 날아다녔다.

 

 


 

 

최문자 시인 / 닿고 싶은 곳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그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서야

꽉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

 

새들도 마지막엔 땅으로 내려온다.

죽을 줄 아는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새처럼 죽기 위하여 내려온다.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온다.

종종거리다가

입술을 대고 싶은 슬픈 땅을 찾는다.

 

죽지 못하는 것들은 다 서 있다.

아름다운 듯 서 있다.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들고

정신의 땀을 흘리고 있다.

 

 


 

최문자 시인

1947년 서울에서 출생.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졸업. 현대문학 박사. 저서로는 시집으로 『귀 안에 슬픈 말 있네』, 『나는 시선 밖의 일부이다』 등과 그밖의 저서로는 『시창작 이론과 실제』『현대시에 나타난 기독교사상의 상징적 해석』등 다수가 있음. 협성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및 제6대 협성대학교 총장 역임. 2008년 제3회 혜산 박두진 문학상, 2009년 제1회 한송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