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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태주 시인 / 오월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0.

나태주 시인 / 오월

 

 

벙그는 목련꽃송이 속에는

아, 아, 아, 아프게 벙그는 목련꽃송이 속에는

어느 핸가 가을 어스름

내가 버린 우레 소리 잠들어 있고

아, 아, 아, 굴뚝 모퉁이 서서 듣던

흰 구름 엉켜드는 아픈 소리

깃들어 있고

천년 전에 이 꽃의 전신을 보시던 이,

내게 하시는 말씀도 스며서 있다.

 

당신이 천년 전에 생겨나든지

제가 천년 후에 생겨나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시무룩히 고개 숙인 옆얼굴까지 속눈썹까지

겹으로 으슥히 스며서 있다.

그늘 아래 샘물로 스며서 있다.

 

 


 

 

나태주 시인 / 외로운 사람

 

 

전화 걸때마다

꼬박꼬박 전화를 받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입니다..

 

불러주는 사람 별로 없고

세상과의 약속도 별로 많지 않은

사람이 분명하니까요

 

전화 걸때마다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는 사람은

더욱 외로운 사람입니다.

 

아예 전화기가 멀리 떨어져

새 소리나 바람소리.

물소리 길을 따라가며

흰 구름이나 바라보고 있는

그런 사람이 분명할 테니까요

 

 


 

 

나태주 시인 / 외할머니

 

 

시방도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외할머니는

 

손자들이

오나오나 해서

흰옷 입고 흰버선 신고

 

조마조마

고목나무 아래

오두막집에서

 

손자들이 오면 주려고

물렁감도 따다 놓으시고

상수리묵도 쑤어 두시고

 

오나오나 해서

고갯마루에 올라

들길을 보며

 

조마조마 혼자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시방도 언덕에 서서만 계실 것이다,

흰옷 입은 외할머니는.

 

 


 

 

나태주 시인 / 욕심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지

비어 있는 나의 잔

다 알아서 주시는 분이 계시는데

투정을 부리지 말아야지

나의 자리 낮음과

가난함과

나약함과

무능함

괜찮다 괜찮다

고개 끄득여 주시는 분이 계시는데.

 

 


 

 

나태주 시인 / 유월은

 

 

유월은

네 눈동자 안에 내리는 빗방울처럼

화사한 네 목소릴 들려주셔요.

 

유월은

장미 가시 사이로 내리는 빗방울처럼

화안한 네 웃음 빛깔을 보여 주셔요.

 

하늘 위엔 흰구름 가슴 속엔 무지개

너무 가까이 오지 마셔요.

그만큼 서 계셔도 숨소리가 들리는 걸요.

 

유월은

네 화려한 레이스 사이로 내다보이는 강변

쓸리는 갈대숲 갈대새 노래 삐릿삐릿

 

유월은

네 받쳐든 비닐우산 사이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하늘빛

비 개인 하늘빛 속살을 보여 주셔요.

 

 


 

나태주(羅泰柱) 시인

1945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 1963년 공주사범학교 졸업.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대숲 아래서』를 비롯, 『누님의 가을』, 『막동리 소묘』, 『사랑이여 조그만 사랑이여』, 『풀잎 속 작은 길』, 『슬픔에 손목 잡혀』, 『산촌 엽서』, 『쪼끔은 보랏빛으로 물들 때』 등과 산문집 『외할머니랑 소쩍새랑』, 『시골사람 시골선생님』, 동화집 『외톨이』 등이 있음. 흙의문학상, 충청남도문화상, 현대불교문화상, 박용래문학상,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황조근조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