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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희덕 시인 / 못 위의 잠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0.

나희덕 시인 / 못 위의 잠

 

 

저 지붕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 봅니다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 온 제비,

거리에선 아직 흙바람이 몰려 오나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 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하나,

 

그 위의 잠

 

 


 

 

나희덕 시인 / 문(門)이 열리고

 

 

한 개의 門이 열려

며칠째 눈발이 천지를 메우더니

천 개의 門이 닫히고

발들은 모두 묶이고 말았네

마른 풀대도

시린 발목을 눈에 묻고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네

소리들도 갇혔네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

가장자리는 얼어가지만

흐르는 물만이 門을 닫지 않아

나는 물소리 앞에 쪼그려 앉았네

천 개의 門이 닫히고

당신에게로 흐르는 水門만이 남았네

눈송이를 낚으려 하나

물에 닿는 순간 사라져버리네

젖은 눈 속에 젖은 눈,

그 열린 門으로 나도 따라 들어가네

 

 


 

 

나희덕 시인 / 바람은 왜 등뒤에서 불어오는가

 

 

바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이 멀 것만 같아

몸을 더 낮게 웅크리고 엎드려 있었다.

떠내려가기 직전의 나무 뿌리처럼

모래 한 알을 붙잡고

오직 바람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그럴수록 바람은 더 세차게 등을 떠밀었다.

 

너를 날려버릴 거야

너를 날려버릴 거야

저 금 밖으로, 흙 밖으로

 

바람은 왜 등 뒤에서 불어오는가

수천의 입과 수천의 눈과 수천의

팔을 가진 바람은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누군가의 마른 종아리를 간신히 붙잡았다.

그 순간 눈을 떴다

 

내가 잡은 것은 뗏목이었다.

아니, 내가 흘러내리는 뗏목이었다.

 

 


 

 

나희덕 시인 / 별

 

 

모질고 모질어라

아직 생명을 달지 못한 별들

어두운 무한천공을 한없이 떠돌다가

가슴에 한 점 내리박히는 일

그리하여 생명의 입김을 가지게 되는 일

가슴에 곰팡이로나 피어나는 일

그 눈부심을 어찌 볼까

눈물 없이 그 앞을 질러 어떻게 달아날까

밤하늘 아래 얼마나 숨죽여 지나왔는데

얻어온 별빛 하나 어디에 둘까

어느 집 나무 아래 묻어놓을까

 

 


 

 

나희덕 시인 / 비 오는 날에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나희덕 시인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그녀에게』, 『파일명 서정시』등과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등과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가 있음.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