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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 / 못 위의 잠
저 지붕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 봅니다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 온 제비, 거리에선 아직 흙바람이 몰려 오나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 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하나,
그 위의 잠
나희덕 시인 / 문(門)이 열리고
한 개의 門이 열려 며칠째 눈발이 천지를 메우더니 천 개의 門이 닫히고 발들은 모두 묶이고 말았네 마른 풀대도 시린 발목을 눈에 묻고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네 소리들도 갇혔네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 가장자리는 얼어가지만 흐르는 물만이 門을 닫지 않아 나는 물소리 앞에 쪼그려 앉았네 천 개의 門이 닫히고 당신에게로 흐르는 水門만이 남았네 눈송이를 낚으려 하나 물에 닿는 순간 사라져버리네 젖은 눈 속에 젖은 눈, 그 열린 門으로 나도 따라 들어가네
나희덕 시인 / 바람은 왜 등뒤에서 불어오는가
바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이 멀 것만 같아 몸을 더 낮게 웅크리고 엎드려 있었다. 떠내려가기 직전의 나무 뿌리처럼 모래 한 알을 붙잡고 오직 바람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그럴수록 바람은 더 세차게 등을 떠밀었다.
너를 날려버릴 거야 너를 날려버릴 거야 저 금 밖으로, 흙 밖으로
바람은 왜 등 뒤에서 불어오는가 수천의 입과 수천의 눈과 수천의 팔을 가진 바람은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누군가의 마른 종아리를 간신히 붙잡았다. 그 순간 눈을 떴다
내가 잡은 것은 뗏목이었다. 아니, 내가 흘러내리는 뗏목이었다.
나희덕 시인 / 별
모질고 모질어라 아직 생명을 달지 못한 별들 어두운 무한천공을 한없이 떠돌다가 가슴에 한 점 내리박히는 일 그리하여 생명의 입김을 가지게 되는 일 가슴에 곰팡이로나 피어나는 일 그 눈부심을 어찌 볼까 눈물 없이 그 앞을 질러 어떻게 달아날까 밤하늘 아래 얼마나 숨죽여 지나왔는데 얻어온 별빛 하나 어디에 둘까 어느 집 나무 아래 묻어놓을까
나희덕 시인 / 비 오는 날에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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