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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동범 시인 / 세계의 끝과 여전히 다정한 연인들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0.

조동범 시인 / 세계의 끝과 여전히 다정한 연인들

 

 

난 어제 지평선을 향해 끝도 없이 걸었고

하이힐을 또각또각

밤새 다리가 아팠어

 

당신이 고마웠고

그러나 당신은 연애를 모르지

그리하여

 

우리는 영원토록 연애를 할 수 없을까?

하지만 나는 문득 당신의 음성을 낭독하고 싶어진다

 

전화해 그러나 위험해

지금 우리는 닿을 수 없는 지상을 걸어가려 하잖아

 

통화는 못 하는 상황이고

사실 말할 힘도 없어요

편지로 남겨줘요

 

기차를 타면 종착역에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몰라

지평선을 간절하게 걸어도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해도 세상의 모든 진심 따위는 믿을 수 없는데

진심을 믿기 시작한 순간 우리는 모두 죽게 될까?

 

그래도 너는 나보다 일찍 죽으면 안 돼

그런데

 

갈라파고스의 특별한 종들은 어떻게 세월을 견디나

세계의 모든 위험들은 예언되지 않는 불운

 

오래된 도시의 성당마다 무너지는 구름은 가득하고

구름 아래 헤어진 엄마는 나를 생각하며 울고 있을까

외롭고 무서워

 

어쨌든 우리 집 쪽으로 와

시간은 두 시 반에서 세 시 정도

 

자판기에서 캔을 꺼내 함께 나눠 마시면

그것은 누군가의 시처럼

캔과 우리 모두의 경험

 

두근거리는 기차를 타고 대륙의 끝까지 간다 해도

모든 것은 되돌릴 수 없는데

나는 당신이 아니어도 하루에도 수십 번 주저앉는데

나는 왜 이럴까

 

당신이 고마웠고

모든 불안과 두려움과 슬픔은

세계의 끝에서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엄마의 음성을 들려주려 한다

 

난 어제 지평선을 향해 끝도 없이 걸었고

밤새 다리가 아팠어

 

소원은 많은데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

 

나는 그저 자판기에서 캔을 꺼내 당신과 함께 나눠 마시고

그것은 캔과 우리 모두의 잊을 수 없는 경험

 

그리하여 그것은

여전히 다정한 연인들의 진심과

잊을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두 시 반 혹은 세 시라는 음성

 

격월간 『시와 표현』 2019년 11~12월호 발표

 

 


 

조동범 시인

2002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금욕적인 사창가』가 있으며, 산문집 『보통의 식탁』, 『알래스카에서 일주일을』,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비평집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4년 11개월 이틀 동안의 비』, 창작 이론서 『묘사』, 『진술』, 『상상력과 묘사가 필요한 당신에게』, 연구서 『오규원 시의 자연 인식과 현대성의 경험』 등을 펴냄.  청마문학연구상, 딩아돌하작품상, 미네르바작품상, 김춘수시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