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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곡 시인 / 간판만 있는 도시
무엇이든 생성되면 이름 하나 짓고 간판을 만든다
이름만 다는 이름 이름을 파는 이름 이름 안에 숨은 이름
그리스 로마의 모든 신들이 도열해 있는 것처럼 낯설고 난해한 길을 걷다 보면 도시는 빌딩 뒤에 숨어 있고 사람은 빌딩 안에 갇혀 있고 빌딩은 간판 뒤에 움츠리고, 모두 간판의 눈치를 본다
먹여 살려야 할 식구를 생각하는 간판의 팔이 십자가의 고상처럼 늘어져 있다 유리 부스 속의 여자처럼 화장을 하고 마주치는 동공 속으로 재빨리 최면도 건다
대개, 간판의 삶은 길지 않지만 종합예술의 장르이고 가장 진화된 사회과학이다 승계의 미학 개조의 경제 언어의 마술 발 빠른 변신 글, 그림의 진화 밥, 가면 혹은 명예
간판 하나 달 집을 찾아 오르막길을 따라간다 이리저리 날리는 명함 필화에 버금가는 담벽의 자유시 잔바람에 펄럭이는 솟대의 오색 깃발 한 골목만 수집하면 피카소의 작품 하나 쯤 간판은 도시의 선도 긋는다
해가 넘어가면 퇴근하는 간판들과 출근하는 간판들의 발걸음이 무겁다 이름표를 찾아다니는 젊은이들과 작은 간판을 짊어진 선생님들의 어깨는 더 무겁다 변두리 골목에서는 간판을 허공에 달고 있는 사람들이 어둠에게 밀려난다
간판 없는 집으로 서둘러 간다
웹진 『시인광장』 2012년 7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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