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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도종환 시인 / 가을사랑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0.

도종환 시인 / 가을사랑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 부는 저녁 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도종환 시인 / 겨울 골짜기에서

 

 

낮은 가지 끝에 내려도 아름답고

험한 산에 내려도 아름다운 새벽 눈처럼

내 사랑도 당신 위에 그렇게 내리고 싶습니다.

밤을 새워 당신의 문을 두드리며 내린 뒤

여기서 거기까지 걸어간 내 마음의

발자국 그 위에 찍어

당신 창 앞에 놓아두겠습니다.

당신을 향해 이렇게

가득가득 쌓이는 마음을 모르시면

당신의 추녀 끝에서 줄줄이 녹아

고드름이 되어 당신에게 보여주겠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바위처럼 돌아앉아 있으면

그래도 당신이 저녁 산처럼 돌아앉아 있으면

바람을 등에 지고 벌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당신을 사랑 했었노라는 몇 줄기

눈발 같은 소리가 되어

하늘과 벌판 사이로 떠돌며 돌아가겠습니다.

 

 


 

 

도종환 시인 / 겨울나기

 

 

아침에 내린 비가 이파리 위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어는 저녁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고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하늘과 땅에서 얻은 것들 다 되돌려 주고

고갯마루에서 건넛산을 바라보는 스님의

뒷모습처럼 서서 빈 가지로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이제는 꽃 한 송이 남지 않고

수레바퀴 지나간 자국 아래

부스러진 잎사귀와 끌려간 줄기의 흔적만 희미한데

그래도 뿌리 하나로 겨울을 나는 꽃들이 있다.

 

비바람 뿌리고 눈서리 너무 길어

떨어진 잎이 세상 거리에 황망히 흩어진 뒤

뿌리까지 잃고 만 밤

씨앗 하나 살아서 겨울을 나는 것들도 있다.

 

이 겨울 우리 몇몇만

언 손을 마주 잡고 떨고 있는 듯해도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견디고 있다.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이기고 있다.

 

 


 

 

도종환 시인 / 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간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우리 비록 개울처럼 어우러져 흐르다

뿔뿔이 흩어졌어도

우리 비록 돌처럼 여기 저기 버려져

말없이 살고 있어도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으나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당신을 생각합니다.

 

 


 

 

도종환 시인 / 그대여 절망이라 말하지 말자

 

 

그대여 절망이라 말하지 말자.

그대 마음의 눈 녹지 않는 그늘 한쪽을

나도 함께 아파하며 바라보고 있지만

그대여 우리가 아직도 아픔 속에만 있을 수는 없다.

슬픔만을 말하지 말자.

돌아서면 혼자 우는 그대 눈물을 우리도 알지만

머나먼 길 홀로 가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지 않은가

눈물로 가는 길 피 흘리며 가야 하는 길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밤도 가고 있는지

그대도 알고 있지 않은가

벗이여 어서 고개를 들자

머리를 흔들고 우리 서로 언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서 가자

그대여 아직도 절망이라고만 말하지 말자.

 

 


 

도종환 시인

1954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84년《분단시대》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두미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릉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등이 있고,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배』,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모과』,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등과 동화 『바다유리』 등이 있음. 1997년 제7회 민족예술상 수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