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문자 시인 / 첫사랑
언젠가 믿지 않았던 말 그 말이 갑자기 믿어진다.
온몸에 푸른 녹이 잔뜩 슬은 말.
오늘 밤 녹을 닦아내고 날을 세워 그 말에 새롭게 찔리우고 싶다.
처음부터 뿌리에 불을 가지고 있던 말
항상 엉기던 생체 그 말에선 푸성귀 냄새가 난다.
최문자 시인 / 팽이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하나님, 팽이 치러 나오세요 무명 타래 엮은 줄로 나를 챙챙 감았다가 얼음판 위에 휙 내던지고, 괜찮아요. 심장을 퍽퍽 갈기세요 죽었다가도 일어설게요 뺨을 맞고 하얘진 얼굴로 아무 기둥도 없이 서 있는 이게, 선 줄 알면 다시 쓰러지는 이게 제 사랑입니다. 하나님
최문자 시인 / 푸른 고통
잎은 괴로웠으리라. 뿌리보다 더 괴로웠으리라. 희망처럼 푸르러야 했으므로 시퍼렇게 멍울진 허세로 꼭 한여름만큼만 연인이어야 했으므로 얼마 안 있어 사랑이 멈출 나무를 잡고 더 괴로웠으리라.
최문자 시인 / 하루
하루 잘 살기란 힘들지요 하루는 하루살이의 전 생애지요 하루살이에게 시한부로 걸린 하루는 사실 하루가 아니지요 사랑하고 꿈꾸고 아이 낳고 투병까지 하는 사람들의 생애지요 삶의 시간은 배고팠지만 하루만 살고도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고 삶을 구걸하지 않는 하루살이 바둥거리지 않고 내리꽂히는 가파른 죽음을 보셨는지요 사람들에게는 없는 하루지요
최문자 시인 / 후회하는 풀
다년초가 못 될지라도 뿌리만은 살아 있고 싶었다.
뿌리의 온몸 중 한 군데라도 성해서 그 자양으로 수도 없이 넘어지던 지난 사랑을 일으키고
사랑의 끝 그 닫힌 쇠철책 끝에 처음 기쁨을 깃발처럼 매달고 싶었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도종환 시인 / 가을사랑 외 4편 (0) | 2020.08.10 |
|---|---|
| 나희덕 시인 / 못 위의 잠 외 4편 (0) | 2020.08.10 |
| 나태주 시인 / 오월 외 4편 (0) | 2020.08.10 |
| 복효근 시인 / 새의 울음소리에는 외 4편 (0) | 2020.08.09 |
| 오정국 시인 / 침묵의 도서관 (0) | 2020.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