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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문자 시인 / 생가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8.

최문자 시인 / 생가

 

 

살아 있는 한 돌아서지 못한다.

꼬집으면

확, 하고 꽃 터질 듯한 자리

누구나

모래바람 일으키며 떠났다가

허기진 애증으로 군데군데 살이 떨어진 채 돌아와

그 원형에 영혼을 다시 대 보지만

닿기만 하고

멍이 지워지지 않는 자리.

무한정하고 소리없이 떨어지던 뒷마당 물앵두꽃

내 가슴을 수없이 다녀갔던 분홍꽃잎

그 꽃비린내로

가슴 울렁이는 매연 속에서도

푸른 뼈 세우며 산다.

 

 


 

 

최문자 시인 / 소나기

 

 

선바위역 근처에서 소나기를 만났다.

물이 무작정 손 발 다 씻어 줬다.

세상의 것들이 모두 우산을 폈다.

젖을 수 없는 부위에다 우산을 씌웠다.

묽어진 세상에 더 물을 붓는다.

없었던 것들이 떠올라 비를 맞고 있다.

풀들도 제 뿌리에서 나와 아무데로나 가고 있다.

어떤 것의 발자국도 남아 있지 못하고 흐르고 있다.

그 사람만 아직 가만히 있다.

당분간 젖지 않을 양

나에게 마른 풀잎으로 바스락거린다.

우산을 쒸우지 않아도 젖지 않는 마른 풀이 있다.

 

 


 

 

최문자 시인 / 시인

 

 

삶의 혓바닥이 나를 찾아낸다.

나를 얼른 알아보고 속도를 낸다.

끔찍한 혀를 가지고 미끄러져 온다.

구체적인 절망을 낼름거리며

목마름으로 온다.

 

빠져나가라

흘러가거라

나는 길을 비켜준다.

 

혓바닥은 완강했다.

드디어 내 알몸이 드러난다.

어느 시인이

삶에게 당했다는 추문이 한동안 무성했다.

 

그러나

확고한 알리바이가 하나 있다.

나는

결코 먹지 못하는 먹이

끝간데까지 가면 터져 버리는 비린내나는 핏줄과

삶의 혓바닥을 찌를 수 있는

위험한 감성의 가시를 감추고 있지.

 

 


 

 

최문자 시인 / 어머니

 

 

알고 있었니

어머니는 무릎에서 흘러내린 아이라는 거

내 불행한 페이지에 서서 죄없이 벌벌 떠는 애인이라는 거

저만치 뒤따라오는 칭얼거리는 막내라는 거

앰불러스를 타고 나의 대륙을 떠나가던 탈옥수라는 거

 

내 몸 어디인가 빈 방에 밤새 서 있는 여자

지익 성냥불을 일으켜 촛불을 켜주고 싶은 사람

 

어머니가 구석에 가만히 서서

나를 꺼내 읽는구나

 

자주 마음이 바뀌는 낯선 부분

읽을 수 없는 곳이 자꾸 생겨나자 몸밖으로 나간 어머니

알고 있었니

기도하는 손을 가진 내 앞에 양 한마리

 

 


 

 

최문자 시인 / 여름 산책

 

 

일 년 중

한 보름 정도만 빼고 나머지는 추웠다.

지구의 가슴이 점점 뜨거워져서

빙벽이 녹아 무너져내린다는데

오랫동안 여름을 보지 못했다.

나는 여름 동안 어디 있었나?

한여름 문 열고 나와본다.

깊은 밤

군데군데 뭉쳐 있던 몸속의 얼음

소름 돋아 오슬오슬 떨려오던 장기들

같이 따라 나선다.

활활 타오르는 땡볕 아래를

얼음을 품고 걷는다.

꽃인지 나무인지 분간 못하게

온몸을 쥐어짜며 푸르기만한

푸르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시린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걷는다.

한여름 속에 살고 있는

이 은밀한 한기

이 추위 깊숙이 저 아래

어쩌면 내가 있으리라.

갑자기 여름이 되지 않는

찬우물 같은 내가

순간순간을 진저리쳐대야 바뀌던 나를

붙잡고 헉헉대며 이미 다 써버린 여름

소낙비처럼 쏟아지다 뒤틀린 땀방울

씻어주는 이 없어 얼고 또 얼던 얼음 위의 얼음

어느 장기 옆일까?

어느 마음 옆일까?

나를 버티게 하던 울툴불퉁한 빙벽이 서 있는 곳

팔보산 정상까지 걸었다.

언젠가 그와 같이 산을 걷다가

추위 깊숙이 웅크린 얼음 서로 만져볼 수 있다면

이 푸른 공기로도

어쩌면 내가 녹아 있으리라.

눈물처럼.

 

 


 

최문자 시인

1947년 서울에서 출생.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졸업. 현대문학 박사. 저서로는 시집으로 『귀 안에 슬픈 말 있네』, 『나는 시선 밖의 일부이다』 등과 그밖의 저서로는 『시창작 이론과 실제』『현대시에 나타난 기독교사상의 상징적 해석』등 다수가 있음. 협성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및 제6대 협성대학교 총장 역임. 2008년 제3회 혜산 박두진 문학상, 2009년 제1회 한송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