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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 /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 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나희덕 시인 / 그곳이 멀지 않다
사람 밖에서 살던 사람도 숨을 거둘 때는 비로소 사람 속으로 돌아온다
새도 죽을 때는 새 속으로 가서 뼈를 눕히리라
새들의 지저귐을 따라 아무리 마음을 뻗어보아도 마지막 날개를 접는 데까지 가지 못했다
어느 겨울 아침 상처도 없이 숲길에 떨어진 새 한 마리
넓은 후박나무 잎으로 나는 그 작은 성지를 덮어주었다
나희덕 시인 / 그때엔 흙에서 흙 냄새나겠지
가야지 어서 가야지 나의 누추함이 그대의 누추함이 되기 전에 담벼락 아래 까맣게 영그는 분꽃씨앗 떨어져 구르기 전에 꽃받침이 시들기 전에 무엇을 더 보탤 것도 없이 어두워져가는 그림자 끌고 어디 흙속에나 숨어야지 참 길게 울었던 매미처럼 빈 마음으로 가야지 그때엔 흙에서 흙냄새 나겠지 나도 다시 예뻐지겠지 몇겁의 세월이 흘러 그대 지나갈 과수원길에 털복숭아 한 개 그대 내 솜털에 눈부셔하겠지 손등이 자꾸만 따갑고 가려워져서
나희덕 시인 / 그런 저녁이 있다
저물 무렵 무심히 어른거리는 개천의 물무늬에 하늘 한구석 뒤엉킨 하루살이떼의 마지막 혼돈이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 바람이 푸른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둑방의 꽃들이
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들으려 한다 어둠이 빛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나무의 나이테를 내 속에도 둥글게 새겨 넣으며 가만 가만히 거기 서 있으려 한다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 하나 옹이로 박힐 때까지
예전의 그 길, 이제는 끊어져 무성해진 수풀더미 앞에 하냥 서 있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나희덕 시인 / 기억의 자리
어렵게 멀어져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까봐 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 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 이제 보여줄 수 있는 건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 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 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의 어귀마다 여름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 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 시든 꽃잎이 그만 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내린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걷는다, 빨리, 기억의 자리마다 발이 멈추어선 줄도 모르고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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