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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희덕 시인 /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8.

나희덕 시인 /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 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나희덕 시인 / 그곳이 멀지 않다

 

 

사람 밖에서 살던 사람도

숨을 거둘 때는

비로소 사람 속으로 돌아온다

 

새도 죽을 때는

새 속으로 가서 뼈를 눕히리라

 

새들의 지저귐을 따라

아무리 마음을 뻗어보아도

마지막 날개를 접는 데까지 가지 못했다

 

어느 겨울 아침

상처도 없이 숲길에 떨어진

새 한 마리

 

넓은 후박나무 잎으로

나는 그 작은 성지를 덮어주었다

 

 


 

 

나희덕 시인 / 그때엔 흙에서 흙 냄새나겠지

 

 

가야지 어서 가야지

나의 누추함이

그대의 누추함이 되기 전에

담벼락 아래 까맣게 영그는 분꽃씨앗

떨어져 구르기 전에

꽃받침이 시들기 전에

무엇을 더 보탤 것도 없이

어두워져가는 그림자 끌고

어디 흙속에나 숨어야지

참 길게 울었던 매미처럼

빈 마음으로 가야지

그때엔 흙에서 흙냄새 나겠지

나도 다시 예뻐지겠지

몇겁의 세월이 흘러

그대 지나갈 과수원길에

털복숭아 한 개

그대 내 솜털에 눈부셔하겠지

손등이 자꾸만 따갑고 가려워져서

 

 


 

 

나희덕 시인 / 그런 저녁이 있다

 

 

저물 무렵

무심히 어른거리는 개천의 물무늬에

하늘 한구석 뒤엉킨

하루살이떼의 마지막 혼돈이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

바람이 푸른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둑방의 꽃들이

 

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들으려 한다

어둠이 빛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나무의 나이테를

내 속에도 둥글게 새겨 넣으며

가만 가만히 거기 서 있으려 한다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 하나

옹이로 박힐 때까지

 

예전의 그 길, 이제는 끊어져

무성해진 수풀더미 앞에 하냥 서 있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나희덕 시인 / 기억의 자리

 

 

어렵게 멀어져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까봐

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

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

이제 보여줄 수 있는 건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

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

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의 어귀마다

여름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

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

시든 꽃잎이 그만

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내린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걷는다, 빨리, 기억의 자리마다

발이 멈추어선 줄도 모르고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

 

 


 

나희덕 시인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그녀에게』, 『파일명 서정시』 등과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등과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가 있음.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