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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남조 시인 / 가고 오지 않는 사람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7.

김남조 시인 / 가고 오지 않는 사람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요행이 그 능력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많이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김남조 시인 / 겨울 꽃

 

 

1

눈길에 안고 온 꽃

눈을 털고 내밀어 주는 꽃

반은 얼음이면서

이거 뜨거워라

생명이여

언 살 갈피갈피

불씨 감추고

아프고 아리게

꽃빛 눈부시느니

 

2

겨우 안심이다

네 앞에 울게 됨으로

나 다시 사람이 되었어

줄기 잘리고

잎은 얼어 서걱 이면서

얼굴 가득 웃고 있는

겨울 꽃 앞에

오랫동안 잊었던

눈물 샘솟아

이제 나

또다시 사람되었어

 

 


 

 

김남조 시인 / 그대 있음에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맘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김남조 시인 / 나의 시에게

 

 

이래도 괜찮은가

나의 시여

거뭇한 벽의 船窓(선창) 같은

벽거울의 이름

암청의 쓸쓸함, 괜찮은가

 

사물과 사람들

차례로 모습 비추고

거울 밑바닥에

혼령 데리고 가라앉으니

천만 근의 무게

아픈 거울 근육

견뎌내겠는가

 

남루한 여자 하나

그 명징의 살결 감히

어루만지며

부끄러워라 통회와 그리움

아리고 떫은 갖가지를

피와 呪言(주언)으로

제상 바쳐도

 

나의 시여

날마다 내 앞에 계시고

어느 훗날 최후의 그 한 사람

되어 주겠는가

 

 


 

 

김남조 시인 / 다시 봄에게

 

 

올해의 봄이여

너의 무대에서

배역이 없는 나는

내려가련다

더하여 올해의 봄이여

너에게 다른 연인이 생긴 일도

나는 알아 버렸어

 

애달픔 지고

순정 그 하나로

눈흘길 줄도 모르는

짝사랑의 습관이

옛 노예의 채찍자국처럼 남아

 

올해의 봄이여

너의 새순에

소금가루 뿌리러 오는

꽃샘눈 꽃샘추위를

중도에서 나는 만나

등에 업고

떠나고 지노니

 

 


 

김남조(金南祚, 1927.9.26~ ) 시인

1927년 경북 대구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 졸업. 1953년 첫 시집 《목숨》으로 등단. 시집으로 『목숨』, 『나아드의 향유』, 『나무와 바람』, 『정념의 기』, 『풍림의 음악』,『겨울 바다』, 『설일』, 『사랑 초서』, 『동행』, 『김대건 신부』, 『빛과 고요』, 『바람 세례』, 『평안을 위하여』, 『희망 학습』 등과 수상집 및 콩트집 『아름다운 사람들』외 다수가 있음. 자유문인협회상(1958), 오월문예상(1963), 시인협회상(1974), 국민훈장 모란장(1993년), 대한민국예술원상(1996), 은관문화훈장(1998), 만해대상(2007) 등을 수상.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한국시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역임. 현재 숙명여대 명예교수, 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