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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문자 시인 / 외출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9.

최문자 시인 / 외출

 

 

시인이 생선을 고른다

값을 물어보기 전에

깊은 바다에 얼마나 드나들었나?

아가미를 열어본다

바다에서 나와 땅에서 떠돌기 얼마나 쓸쓸했나?

지느러미 힘줄을 들쳐본다

정말 바다의 자식인지

등짝에서 파도에게 매맞은

푸른 멍자국을 찾아본다

얼마나 바다를 토애내야 죽을 수 있었나?

핏발 선 눈알을 들여다본다

아직도

뻐끔거리던 입마다 바다가 몰려있는데

와르르 와르르 파도가 몰려와 좌판을 때리고 가는데

싸요, 싸

단 돈 오천 원에 싱싱한 주검이 두 마리

수산시장 비린내만 묻히고 그냥 돌아온다

나를 따라 일어서는 겨울 바다

노량진 역에서 같이 지하철을 탄다

 

 


 

 

최문자 시인 / 정거장

 

 

강 건너 저 편

내 철없는 정거장에

기차 한 대 멈춰서 있었다

긴 가을 건너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도착한 기차

가슴까지 밟고 서 있다가

슬금슬금 떠나고 나니

번갯불로 바퀴를 껴안았던 레일

쓰러져 울다 지쳐 잠들었다

들꽃 한 무더기가

피다 흔들리다 흠뻑 비를 맞는 곳

강 건너 저 편

철없는 내 자리에

싹을 못내는 검은 침묵들을 눕히고

새로 레일을 놓는다

안개 낀 가슴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들이닥친 기차를 위하여

 

 


 

 

최문자 시인 / 정전기

 

 

건기인가 봐요 우리,

새들도 입안이 마른다는.

바짝 마른 말로 통화하고 있잖아요 지금,

마른 대궁만 남은 당신 말에

나는 없는 미련 지지직거리며

타는 시늉 다 해보지만

갑자기 들러붙어요

말과 말 사이

부슬부슬 떨어지는 말의 먼지들 뿌연데

들리죠

우리 언어가 물 마르는

소리 따가워요

메마른 통화

갈라진 언어의 살 사이로

피 내비쳐요

건기인가 봐요 우리,

 

 


 

 

최문자 시인 / 죄책감

 

 

하나님이

강둑에 세워둔 표지판

'낚시 금지'

하나님이 말갛게 씻어놓은 죄를

이미 용서받은 물고기들을

밤새워 내가 끄집어올립니다

비린내 진동하는 날밤 새우며

 

 


 

 

최문자 시인 / 지상에 없는 잠

 

 

어젯밤 꽃나무 가지에서 한숨 잤네

외로울 필요가 있었네

우주에 가득찬 비를 맞으며

꽃잎 옆에서 자고 깨보니

흰 손수건이 젖어 있었네

지상에서 없어진 한 꽃이 되어 있었네

한 장의 나뭇잎을 서로 찢으며

지상의 입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네

저물녘 마른 껍질 같아서 들을 수 없는 말

나무 위로 올라오지 못한 꽃들은

짐승 냄새를 풍겼네

내가 보았던 모든 것과 닿지 않는 침대

세상에 닿지 않는 꽃가지가 좋았네

하늘을 데려다가 허공의 아랫도리를 덮었네

어젯밤 꽃나무에서 꽃가지를 베고 잤네

세상과 닿지 않을 필요가 있었네

지상에 없는 꽃잎으로 잤네

 

 


 

최문자 시인

1947년 서울에서 출생.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졸업. 현대문학 박사. 저서로는 시집으로 『귀 안에 슬픈 말 있네』, 『나는 시선 밖의 일부이다』 등과 그밖의 저서로는 『시창작 이론과 실제』『현대시에 나타난 기독교사상의 상징적 해석』등 다수가 있음. 협성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및 제6대 협성대학교 총장 역임. 2008년 제3회 혜산 박두진 문학상, 2009년 제1회 한송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