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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 / 길 위에서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나희덕 시인 / 너무 많이
그때 나를 내리친 것이 빗자루방망이였을까 손바닥이었을까 손바닥이었을까 손바닥에 묻어나던 절망이었을까. 나는 방구석에 쓰레받기처럼 처박혀 울고 있었다. 창 밖은 어두워져갔고 불을 켤 생각도 없이 우리는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침침한 방의 침묵은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느껴져 하마터면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을 뻔했다. 그러나 마른번개처럼 머리 위로 지나간 숱한 손바닥에서 어머니를 보았다면, 마음이 마음을 어루만지는 소리를 들었다면, 나는 그때 너무 자라버린 것일까. 이제 누구도 때려주지 않는 나이가 되어 밤길에 서서 스스로 뺨을 쳐볼 때가 있다. 내 안의 어머니를 너무 많이 맞게 했다.
나희덕 시인 /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사랑에도 속도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솔잎혹파리가 숲을 휩쓰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한 순간인 듯 한 계절인 듯 마음이 병들고도 남는 게 있다면 먹힌 마음을 스스로 달고 서 있어야 할 길고 긴 시간일 것입니다. 수시로 병들지 않는다 하던 靑靑의 숲마저 예민해진 잎살을 마디마디 세우고 스치이는 바람결에도 빛 그림자를 흔들어댈 것입니다 멀리서 보면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단풍이 든 것만 같아 그 미친 빛마저 곱습니다.
나희덕 시인 /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어느 부끄러운 영혼이 절간 옆 톱밥더미를 쪼고 있다. 마치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정답다. 왜 하필이면 까마귀냐고 묻지는 않기로 한다. 새도 짐승도 될 수 없어 퍼드득 낮은 날개의 길을 내며 종종걸음 치는 한 生의 지나감이여 톱밥가루는 생목의 슬픔으로 젖어 있고 그것을 울며 가는 나여 짙은 그늘 속 떠나지 않는 너를 들여다보며 나는 이 생의 나와 화해한다. 그리고 산을 내려가면서 불쌍히 여길 무엇이 남아 있는 듯 까욱까욱 울음소리를 한번 내보기도 한다.
나희덕 시인 / 땅끝
산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렸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넸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쫓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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