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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희덕 시인 / 서시(序時)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2.

나희덕 시인 / 서시(序時)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나희덕 시인 / 성(聖) 느티나무

 

 

속이 검게 타버린 고목이지만

창녕 덕산리 고묵나무는 올봄도 잎을 내었다

 

찬가지 끝으로 잎을 밀어올리며 그는

한그루 용수처럼

제 아궁이에서 잎사귀를 꺼낸다

번개가 가슴을 쪼개고 지나간 흔적을 안고도

저럻게 눈부신 잎을 피워내다니,

시커먼 아궁이 하나 들여 놓고

그는 오래오래 제살을 달여 내놓는다

낮의 새와 밤의 새가 다녀가고

다람쥐 일가가 세들어 사는,

구름 몇 점 별 몇 개 뛰어들기도 하는,

바람도 가만히 숨을 모으는 그 검은 아궁이에는

모든 빛이 모여 불타고 모든 빛이 나온다

까마귀 깃들었다 날아간 자리에

검은 울음 몇가지 뻗어 있기도 한다

발이 묶인체 날아오르는 새처럼

덕산리 느티나무는 푸른 날개를 마악 펴들고 있다

 

 


 

 

나희덕 시인 / 속리산에서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나희덕 시인 / 심장 속의 두 방

 

 

나를 좀 지워주렴.

 

거리를 향해 창을 열고

안개를 방안으로 불러들였다

안개는 창을 넘는 순간 증발해버렸다

 

나를 좀 지워주렴.

 

짙은 안개를 들이키고도

사물들은 여전히 건조한 눈을 비비고 있었다

 

나를 좀 채워주렴.

 

바다를 향해 열린 창으로

안개가 밀물처럼 스며들었다

안개는 창을 넘는 순간 몸 속으로 흘러들었다

 

나를 좀 채워주렴.

 

의자가 젖고 거울이 젖고

사물들은 어느새 안개의 일부가 되었다

 

심장 속에 나란히 붙은 두 방은

서로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두 방을 오가는 것은

소리 없이 출렁거리는 안개뿐

 

 


 

 

나희덕 시인 / 이따금 봄이 찾아와

 

 

내 말이 네게로 흐르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공중에서 얼어 붙는다

허공에 닿자 굳어버리는 거미줄처럼

 

침묵의 소문만이 무성할 뿐

말의 얼음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따금 봄이 찾아와

새로 햇빛을 받은 말들이

따뜻한 물 속에 녹기 시작한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지랑이처럼

물 오른 말이 다른 말을 부르고 있다

 

부디,

이 소란스러움을 용서하시라

 

 


 

나희덕 시인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그녀에게』, 『파일명 서정시』등과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등과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가 있음.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