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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도종환 시인 / 늦깎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2.

도종환 시인 / 늦깎이

 

 

고통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 때문에

고통은 깊어갑니다.

이별이 온 뒤에야 사랑을 알고

사랑하면서 외로움은 깊어갑니다.

죽음을 겪은 뒤 삶의 뜻 알 것 같아

고개 드니 죽음이 성큼 다가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짧은 동안

잃지 않고 얻는 것은 없으며 최후엔

또 그것마저 버리게 됩니다.

 

 


 

 

도종환 시인 / 다시 떠나는 날

 

 

깊은 물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물고기처럼

험한 기슭에 꽃 피우길 무서워하지 않는 꽃처럼

길 떠나면 산맥 앞에서도 날개 짓

멈추지 않는 새들처럼

 

그대 절망케 한 것들을

두려워 하지만은 않기로

꼼짝 않는 저 절벽에 강한 웃음

하나 던져두기로

산맥 앞에서도 바람 앞에서도 끝내

멈추지 않기로

 

 


 

 

도종환 시인 / 당신과 가는 길

 

 

별빛이 쓸고 가는 먼 길을 걸어 당신께 갑니다.

모든 것을 다 거두어간 벌판이 되어

길의 끝에서 몇 번이고 빈 몸으로 넘어질 때

풀뿌리 하나로 내 안을 뚫고 오는

당신께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이 땅의 일로 가슴을 아파할 때

별빛으로 또렷이 내 위에 떠서 눈을 깜빡이는

당신과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동짓달 개울물 소리가 또랑또랑

살얼음 녹이며 들려오고

구름 사이로 당신은 보입니다.

바람도 없이 구름은 흐르고

떠나간 것들 다시 오지 않아도

내 가는 길 앞에 이렇게 당신은 있지 않습니까

당신과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도종환 시인 / 당신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초저녁달이 떴습니다.

당신과 헤어지던 팔월입니다.

당신과 함께 죽음에 맞서 싸우던

그 뜨겁던 여름 석달 처럼

올해도 뜨거운 여름입니다

당신에게서 얻은 겨자씨 만한 사랑을

이 세상에 심고 가꾸는 일이

어찌 이리 어렵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는 죽음으로 가는 길까지도

하나 되어가지만

미워하는 사람 어두운 사람들의 밭에

씨앗 하나 가꾸고 풀 한 포기 뽑아내는 일이

이 세상에서는 어쩌면 이리 어렵습니까

크고 하나인 것을 사랑하는 것보다

작은 여럿인 것을 사랑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가는 길은

초저녁달이 구름을 헤치고 가는 것처럼

그렇게 가는 길이 아닙니다.

풀벌레 울음이

깊은 밤의 가운데를 뚫고 가는 것처럼

그렇게 은은히 가지 않습니다.

자식을 찾는 어머니의 애끓는 목청처럼 갑니다.

모래밭에 쓰러진 이에게 마지막 남은

내 몫의 물을 내어주고

내가 타는 목으로 가듯 가는 길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던 그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일보다

이 세상을

두루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더 어려운지

알게 하시려는 뜻으로 새기며

조용히 견디고 있습니다.

지금은 나를 여기 가두고 창 밖으로

흐르는 세월을 봅니다.

비가 내리다 그치고

 

구름이 모였다 흩어지면서

아침이 오고 저녁바람이 부는 것을 봅니다.

많은 이들이 우리 곁을 울면서 떠나고

손에 끌려 돌아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물 그들의 돌아서던 뒷모습까지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지금은 말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우리를 미워하던 이들까지도 사랑할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여기 이 자리에 끝까지 남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결코 삿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이 감옥에 홀로라도 남습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기로 함께 손을 잡고 다짐하던

처음 그 마음 한가운데 남아

먼 길을 지나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을 기다릴 것입니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가야 할 길이 더 많아서

함께 나눈 사랑보다 함께 해야 할

사랑의 날들이 더 많아서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

그저 살아가는 일이 될 때까지

여기 이 자리에 남기로 합니다.

 

 


 

 

도종환 시인 / 돌아가는 꽃

 

 

간밤 비에 꽃 피더니

그 봄비에 꽃 지누나

 

그대로 인하여 온 것들은

그대로 인하여 돌아가리

 

그대 곁에 있는 것들은

언제나 잠시

 

아침 햇빛에 아름답던 것들

저녁 햇살로 그늘지리

 

 


 

도종환 시인

1954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84년《분단시대》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두미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릉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등이 있고,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배』,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모과』,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등과 동화 『바다유리』 등이 있음. 1997년 제7회 민족예술상 수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