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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승자 시인 / 가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2.

최승자 시인 / 가을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그런데 세월이 내게로 왔습니다

내 문간에 낙엽 한 잎 떨어뜨립디다

가을입니다

 

그리고 일진광풍처럼 몰아칩디다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

오늘 내 문간에 기어이 휘몰아칩디다

 

 


 

 

최승자 시인 /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아직 불기가 남아 있는지

그대의 아궁이와 굴뚝에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지

 

잡탕 찌개백반이며 꿀꿀이죽인

나의 사랑 한 사발을 들고서,

그대 아직 연명하고 계신지

그대 문간을 조심히 두드려봅니다.

 

 


 

 

최승자 시인 / 근황

 

 

못 살겠습니다.

(실은 이만하면 잘 살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원한다면, 죽여주십시오.

 

생각해보면,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내 죄이며 내 업입니다.

그 죄와 그 업 때문에 지금 살아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잘 살아 있습니다.

 

 


 

 

최승자 시인 / 기억하는가

 

 

기억하는가

우리가 만났던 그 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 뒤척였다.

 

 


 

 

최승자 시인 / 나는 그대의 벽을 핥는다

 

 

나는 그대의 벽을 핥는다.

달디단 내 혀의 입맞춤에 녹아

무너져라고 무너져라고

나는 그대의 벽을 핥는다.

 

그러나 결코 사랑은 아니라고

깨달아지는 이 나이는 무슨 나이인가?

결코 사랑만이 아니다.

결코 사랑만으로는 태부족이다.

이런, 나는 호 혹시

테러리스트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오 꼬집어다오, 형제여, 내가 호 혹시

깡패의 순정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최승자(1952년 ~ ) 시인

1952년 충남 연기에서 출생. 서울의 수도여고를 거친 그는 1971년 고려대학교 독문과에 입학. 고려대 재학중 교지 『고대문화』의 편집장을 맡은 최승자는 유신 시대에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가 학교에서 쫓겨난다. 그 후 학교 선배인 정병규가 주간으로 있던 ‘홍성사' 편집부에 들어간다. 최승자는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에 「우리 시대의 사랑」 등 몇 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옴. 홍성사를 그만둔 그는 이후 번역 문학가로 활동하며 시 쓰기에 전념하며 1993년에는 미국 아이오와대학교 창작 프로그램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다섯 권의 시집을 냈다. 『이 시대의 사랑』(1981) · 『즐거운 일기』(1984)· 『기억의 집』(1989) · 『내 무덤, 푸르고』(1993) · 『연인들』(1998)이다.

2001년 이후 투병을 하면서 시작 활동을 한동안 중단했다가 다시 시를 발표했다. 2010년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 , 2016년 《빈 배처럼 텅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박노해, 황지우, 이성복 등과 함께 시의 시대 80년대가 배출한 스타 시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2010년 : 제18회 대산문학상. 2010년 : 제5회 지리산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