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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시인 / 감자의 몸
감자를 깎다 보면 칼이 비켜 가는 움푹한 웅덩이와 만난다 그곳이 감자가 세상을 만난 흔적이다 그 홈에 몸 맞췄을 돌멩이의 기억을 감자는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벼랑의 억센 뿌리들처럼 마음 단단히 먹으면 돌 하나 깨부수는 것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뜨거운 夏至의 태양에 잎 시들면서도 작은 돌 하나도 생명이라는 뿌리의 그 마음 마르지 않았다 세상 어떤 자리도 빌려서 살아가는 것일 뿐 자신의 소유는 없다는 것을 감자의 몸은 어두운 땅 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웅덩이 속에 씨눈이 하나 옹글게 맺혀 있다 다시 세상에 탯줄 댈 씨눈이 옛 기억을 간직한 배꼽처럼 불거져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독을 가득 품은 것들이라고 시퍼런 칼날을 들이댈 것이다
길상호 시인 / 강아지풀
지난 세월 잘도 견뎌냈구나 말복 지나 처서 되어 털갈이 시작하던 강아지풀 , 제대로 짖어 보지도 못하고 벙어리마냥 혼자 흔들리며 잘도 버텨냈구나 외딴 폐가 들러 주는 사람도 없고 한 웅큼 빠져 그나마 먼지 푸석한 털 누가 한 번 보듬어 주랴, 눈길이나 주랴 슬픔은 슬픔대로 혼자 짊어지고 기쁨은 기쁨대로 혼자 웃어 넘길 일 무리 지어 휘몰려 가는 바람 속에 그저 단단히 뿌리박을 뿐, 너에게는 꽃다운 꽃도 없구나 끌어올릴 꿈도 이제 없구나 지금은 지붕마다 하얗게 눈이 내리고 처마 끝 줄줄이 고드름 자라는 계절 빈집에는 세월도 잠깐 쉬고 있는 듯 아무런 기척 없는데 너희만 서로 얼굴 비비며 마음 다독이고 있구나 언 날이 있으면 풀릴 날도 있다고 말없이 눈짓으로 이야기하고 있구나 어느새 눈은 꽃잎으로 떨어져 강아지풀, 모두 눈꽃이 된다
길상호 시인 / 개미의 바느질
개미가 많은 집에 살았네 장판과 벽 사이 문턱과 바닥 사이 일렬로 늘어선 개미 행렬은 어머니 바늘을 뒤따르는 실처럼 개미 개미 개미 개미 …… 벌어진 사이를 꿰맸네 아껴야 잘 사는 것이여, 날마다 허리를 졸라매던 그녀도 한 마리 붉은 개미 그래도 허기를 벌리는 입은 쉽게 봉할 수 없었네 날마다 늘어나는 틈새를 독하게 기워내는 바늘, 녹슬 틈 없던 그녀의 믿음 아니었으면 벌써 무너졌을 그 집에서 나 그녀로부터 바람 하나 들지 않는 옷 한 벌 얻어 입고 살았네
길상호 시인 / 겨울눈
그 날은 나무와 눈이 맞았다 한동안 뿌리 근처를 서성이며 내가 불쌍한가, 나무가 더 불쌍한가 가늠했다 처음에 잎도 하나 없는 나무쪽으로 연민의 무게가 기울었다 아버지는 떠났지만 아직 어머니가 남아 있고 바람 잘 날 없었지만 이제는 바람에도 이골이 났으므로 나무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무의 눈과 마주친 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나무는 솜털 덮인 눈, 따뜻한 눈으로 터무니없는 내 생각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우습다는 듯 우습다는 듯 첫눈은 가지마다 내려 쌓였고 그날 겨울눈을 준비하지 못한 나는 그만 나무 밑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길상호 시인 / 국화가 피는 것은
바람 차가운 날 국화가 피는 것은, 한 잎 한 잎 꽃잎을 펼 때마다 품고 있던 향기 날실로 뽑아 바람의 가닥에 엮어 보내는 것은, 생의 희망을 접고 떠도는 벌들 불러모으기 위함이다 그 여린 날갯짓에 한 모금의 달콤한 기억을 남겨 주려는 이유에서이다 그리하여 마당 한편에 햇빛처럼 밝은 꽃들이 피어 지금은 윙윙거리는 저 소리들로 다시 살아 오르는 오후, 저마다 누런 잎을 접으면서도 억척스럽게 국화가 피는 것은 아직 접어서는 안 될 작은 날개들이 저마다의 가슴에 움트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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