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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길상호 시인 / 감자의 몸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8. 17.

길상호 시인 / 감자의 몸

 

 

감자를 깎다 보면 칼이 비켜 가는

움푹한 웅덩이와 만난다

그곳이 감자가 세상을 만난 흔적이다

그 홈에 몸 맞췄을 돌멩이의 기억을

감자는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벼랑의 억센 뿌리들처럼 마음 단단히 먹으면

돌 하나 깨부수는 것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뜨거운 夏至의 태양에 잎 시들면서도

작은 돌 하나도 생명이라는

뿌리의 그 마음 마르지 않았다

세상 어떤 자리도 빌려서 살아가는 것일 뿐

자신의 소유는 없다는 것을 감자의 몸은

어두운 땅 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웅덩이 속에

씨눈이 하나 옹글게 맺혀 있다

다시 세상에 탯줄 댈 씨눈이

옛 기억을 간직한 배꼽처럼 불거져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독을 가득 품은 것들이라고

시퍼런 칼날을 들이댈 것이다

 

 


 

 

길상호 시인 / 강아지풀

 

 

지난 세월 잘도 견뎌냈구나

말복 지나 처서 되어 털갈이 시작하던

강아지풀 , 제대로 짖어 보지도 못하고

벙어리마냥 혼자 흔들리며 잘도 버텨냈구나

외딴 폐가 들러 주는 사람도 없고

한 웅큼 빠져 그나마 먼지 푸석한 털

누가 한 번 보듬어 주랴, 눈길이나 주랴

슬픔은 슬픔대로 혼자 짊어지고

기쁨은 기쁨대로 혼자 웃어 넘길 일

무리 지어 휘몰려 가는 바람 속에

그저 단단히 뿌리박을 뿐, 너에게는

꽃다운 꽃도 없구나

끌어올릴 꿈도 이제 없구나

지금은 지붕마다 하얗게 눈이 내리고

처마 끝 줄줄이 고드름 자라는 계절

빈집에는 세월도 잠깐 쉬고 있는 듯

아무런 기척 없는데 너희만 서로

얼굴 비비며 마음 다독이고 있구나

언 날이 있으면 풀릴 날도 있다고

말없이 눈짓으로 이야기하고 있구나

어느새 눈은 꽃잎으로 떨어져

강아지풀, 모두 눈꽃이 된다

 

 


 

 

길상호 시인 / 개미의 바느질

 

 

개미가 많은 집에 살았네

장판과 벽 사이

문턱과 바닥 사이

일렬로 늘어선 개미 행렬은

어머니 바늘을 뒤따르는 실처럼

개미 개미 개미 개미 ……

벌어진 사이를 꿰맸네

아껴야 잘 사는 것이여,

날마다 허리를 졸라매던 그녀도

한 마리 붉은 개미

그래도 허기를 벌리는 입은

쉽게 봉할 수 없었네

날마다 늘어나는 틈새를

독하게 기워내는 바늘,

녹슬 틈 없던 그녀의 믿음 아니었으면

벌써 무너졌을 그 집에서

나 그녀로부터

바람 하나 들지 않는

옷 한 벌 얻어 입고 살았네

 

 


 

 

길상호 시인 / 겨울눈

 

 

그 날은 나무와 눈이 맞았다

한동안 뿌리 근처를 서성이며

내가 불쌍한가, 나무가 더 불쌍한가 가늠했다

처음에 잎도 하나 없는 나무쪽으로

연민의 무게가 기울었다

아버지는 떠났지만 아직 어머니가 남아 있고

바람 잘 날 없었지만

이제는 바람에도 이골이 났으므로

나무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무의 눈과 마주친 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나무는 솜털 덮인 눈, 따뜻한 눈으로

터무니없는 내 생각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우습다는 듯 우습다는 듯

첫눈은 가지마다 내려 쌓였고

그날 겨울눈을 준비하지 못한 나는 그만

나무 밑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길상호 시인 / 국화가 피는 것은

 

 

바람 차가운 날

국화가 피는 것은,

한 잎 한 잎 꽃잎을 펼 때마다

품고 있던 향기 날실로 뽑아

바람의 가닥에 엮어 보내는 것은,

생의 희망을 접고 떠도는 벌들

불러모으기 위함이다

그 여린 날갯짓에

한 모금의 달콤한 기억을

남겨 주려는 이유에서이다

그리하여 마당 한편에

햇빛처럼 밝은 꽃들이 피어

지금은 윙윙거리는 저 소리들로

다시 살아 오르는 오후,

저마다 누런 잎을 접으면서도

억척스럽게 국화가 피는 것은

아직 접어서는 안 될

작은 날개들이 저마다의 가슴에

움트고 있기 때문이다

 

 


 

길상호 시인

1973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그 노인이 지은 집〉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문학세계사, 2004)와 『모르는 척』(천년의시작, 2007), 『눈의 심장을 받았네』(실천문학사, 2010)가 있음. 2004년 현대시동인상, 천상병 시상, 김달진 젊은시인상 등 수상.